IBS Institute for Basic Science
Search

명견만리-기초과학(일본편)

  • 작성자Center for Integrated Nanostruture Physics
  • 등록일2016-06-26
  • 조회수7425
  • 파일
내용보기

이번 해외출장은 악몽이다. 힘든 것은 우리 팀도 KBS 팀도 마찬가지다. KBS도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내 해외학회 출장에 맞추어 일정을 맞추자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일정을 맞춘 것 자체가 기적이다. 미리 일본에 상주하는 코디에게 부탁하여 나고야 대학, 두개의 절을 3일안에 예약해 놓았다. 동경에 밤 늦게 도착하니 코디가 택시기사를 보내놓았다. 이미 KBS 배 PD와 권 감독은 전날 방문하여 일본 에도때부터 내려온 산수문제풀이가 보관되어 있는 절에 다녀왔다. 그것도 동경에서 수백키로 떨어진 곳을 하루만에 처리한 것이다. 학생들까지 만나고 취재하고 왔다니 가히 번개불에 꽁 튀겨 먹는 수준이다.

다음날 새벽 6시에 기상하여 아침도 안 먹고 나고야행 신간센을 탔다. 역에서 도시락을 구입하여 기차 안에서 먹었다. 여행은 적어도 아침을 잘 먹어야 하루를 버틸 수 있는데 이것은 내 공식과 사뭇 다르다. 역에서 들어가는 샷, 기차 안에서 일부 촬영하고 나고야 대학에서 찍을 전략을 구상했다. 두 시간 동안 눈도 못 붙이고 가니 배 PD가 전날 잠을 설쳤는지 눈을 비비고 있다. 내가 할 말이 많다보니 그런 안배를 못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나고야 역이다. 렌트카를 구하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나고야 대학에 도착하니 이미 TM연구소 직원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좀 늦었다.

나고야 대학은 최근 노벨상을 6명이나 수상한 지방 명문대학이다. 동경대나 교토대학을 앞선 대학이다. 그 중 5명이 모두 나고야대학 출신이니 대단하다. 전에 자주 온 대학이고 한달간 머물렀던 대학이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입자물리 실험실 취재를 안내했지만 실제 실험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실제 실험은 스위스 선에 가서 하고 여기서는 관련된 검출기를 제작하거나 기록된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소한 것인데도 이 친구들은 장비를 구입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실험하는 것을 선호한다. 핵에멀션 필름을 유지시키기 위해 실험실에 가습기가 필요한데 팬을 돌려 물분자를 날리는 것으로 대치하였다. 방이 커서 사는 것이 비싸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우리 같으면 사서 했을 것이다. 핵 에멸션 필름을 읽기 위해 스캐너가 필요한데 그것도 살 수 있겠지만 스캔모터를 붙혀 제작해 쓰고 있다. 핵 에멀션도 20년전에 스스로 만든 재료라고 한다. 이런 장치를 이용해 사사기 교수가 50년전 예언했던 뉴트리노 진동 모형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고 젊은 교수가 자부심있게 설명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장인정신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사사끼 교수가 만들어 놓은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오랜 전통을 갖고 있을까. 또 앞으로 있다고 해도 이어갈 수 있을까. 세종대왕때 꽃 피웠던 과학은 왜 우리에게 이어지지 않았을까 곱씹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몇 군데를 촬영하다 보니 점심때가 되어 교내 빵 집에서 간단한 햄버거로 때웠다. 1시에 노벨센터에서 KM연구소 부소장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전에 성대에서 성대-나고야 대학 심포지엄때 만났던 친구였다. 덕분에 인터뷰는 아주 쉬웠다. 일종의 노벨상 수상자를 기념하는 기념관이었다. 수상자들의 연구 실적을 소개해놓은 곳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최근의 노벨상 수상은 사사키 교수가 만들어 놓은 전통 덕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본인도 일찍 죽어 노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전통으로 후배들이 덕을 본 것이다. 사사키 교수는 소탈하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전시해놓은 사진에 사사키 교수가 학생들과 신문지로 말아 때리는 게임하는 모습이 있었다, 또 학생이 이겨 교수를 신문으로 때리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아마 요즈음 학생들은 감히 그렇게 못할 것이다. 부소장도 그런 것을 지적하였다. 그런 자유분방한 모습이 학문에 녹아들어 전통과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연구결과를 창출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래도 가능했는데 나이든 나를 과연 학생들이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의 숙제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 자유스러운 분위기 어려운 숙제를 안고 왔다.

저녁에는 미리 약속했던 오랜 친구인 노리 시뇨하라를 만났다. 사실 KBS 팀들과 같이 식사를 하려고 만나면 양해를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이 친구가 이미 같이 예약을 미리 예약을 해 놓았다. KBS 팀은 사실 어색할까봐 따로 먹기를 원했지만 노리의 호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같이 합석했다. 노리는 오랜 친구이지만 정말 좋은 드문 일본 친구이다. 일인당 5천엔이 넘은 일본 정식 음식점이다, 입구도 잘 보이지 않을만큼 한적한 곳에 있다. 아마 우리가 가면 절대로 가지 못할 음식점일 것이다. 음식이 아주 특별하다. 이제까지 먹어보지 못한 종류의 음식이 많았다. 조금씩 나오지만 먹다보면 배부른 것이 일본 음식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노리는 무알코올 맥주를 시키고 우리는 일본 맥주를 시켜 한잔씩 했다. 일을 마치고 마시는 시원한 한잔의 맥주가 정말 꿀 맛이었다. 그런데 그만 노리가 음식값을 미리 내어버렸다. 사실 저녁을 내가 내려고 갖고 있던 일본돈을 가져온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실 출장을 다니면서 난 그 곳의 좋은 음식을 꼭 한번씩 먹어보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돈이 아까워 못했는데 나이가 들어 바뀐 것이다. 죽어서 돈 갖고 가는 것은 아니니까. KBS는 공무 출장이라 그런 비싼 음식값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짐작했고 그래서 준비한 것이데 노리가 선수친 것이다. 나오바리라는 것이다. 우리끼리는 그렇다치고 다른 사람들도 잇는데 내가 조금 미안했다. 다음에 노리가 한국오면 내가 원수(??) 갚을 것이다. 친구란 이래서 좋은 것이다. 또 노리한테서 나고야 대학의 전통을 들은 것도 수확이었다. 시작때부터 조금 달랐다. 제국대학중 조금 늦게 학교가 시작해 좋은 사람들을 다 다른 대학에 빼앗기고 결국 전국 각지 출신의 교수들을 뽑은 것이 대학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그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의 명문대학의 기틀이 된 것이었다. 학문에서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동경대 출신이 대부분인 교수로 구성된 동경대가 왜 나고야대학보다 노벨상 수가 적은지 상관관계를 따진다면 너무 큰 억측일까.

다음날은 그나마 아침에 시간이 있어 7시에 일어나 사우나도 하고 아침도 먹었다. 빡빡한 일정이 예상되어 아침을 든든히 먹었는데 정말 그러지 않았으면 못 버틸 하루였다. 9시쯤 렌트카를 타고 남쪽으로 삼정사라는 절에 갔다. 2시간 이상을 운전하고 11시쯤 도착할거라 예상했지만 11시반쯤 도착하여 촬영을 시작하였다. 촬영도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절의 규모가 상상을 불허한다. 이곳에 온 이유는 일본의 오랜 전통인 수학문제를 보관한 절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에도때부터 일본사람들은 수학문제 풀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문제를 직접내고 다른 사람이 풀면 그 결과를 절에 걸어놓아 자랑하기도 했다. 또 절은 그것을 신도들의 봉헌으로 여겨 보관해 놓았다고 한다. 이곳의 본사인 관음관에 가보니 정말로 에도때 걸어놓았던 문제집이 걸려있었다. 거의 달아서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기록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그 옆에는 이곳 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산액들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과거 전통과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흔적인 것이다. 문제들을 자세히 보니 중학생이 풀기에 어려운 기하학의 문제도 보이고 금방 풀 수 있는 문제도 보인다. 하지만 그 옛날 에도때 즐겼던 지적인 놀음을 중요한 전통으로 여겨 지금까지 보관해놓고 그 전통을 이어가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것이 일본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기초과학의 역사가 5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200년 이상의 일본의 전통에 그저 아연할 따름이다. 이런 긴 시간의 저축이 지금의 일본의 노벨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정부가 집중하여 연구비를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곧 더 큰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대목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다보니 시간 조정에 문제가 생겼다. KBS 팀이 5시 반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야 하는데 이미 그때가 2시반이 넘었다. 점심도 먹지 않고 강행군했는데도 시간이 넘어버린 것이었다. 비행장까지는 1시간반이면 된다고 하니 가능도 할 법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꼭 예상대로 되지 않는 법. 문제는 나오려고 하는데 안내 코디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서두르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전화기를 잃어버리면 폐인이 된다. 그래서 돌아온 궤적을 모두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 사이 시간은 지나고 배 PD는 여행사와 전화해 근처의 다른 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스케줄을 찾았다. 김 코디는 갖고 있는 전화기로 계속 신호를 보내면서 결국은 근처의 길 옆에서 전화기를 찾았다.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또 다행히 조금 먼 오사카 공항에 저녁 7시 40분 비행기가 있어 배 PD가 예약하고 겨우 1시간 전에 비행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나는 오사카 신간센 역에 내려 토야마 신간센 기차표를 끊었다. 8시 반 막차를 다행히 탈 수 있었다. 20분 정도 여유가 있어 벤토를 샀다. 배도 고팠다. 중간에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이것으로 끝나나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기차를 타고 토야마 호텔예약을 살펴보니 웬걸 그날 밤 예약이 없었다. 옥주한테 전화해보니 KBS와 서로 스케줄 조정하면서 혼돈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한국에 도착한 배 PD가 또 일본에 있는 코디에 연락을 해 겨우 다시 예약할 수 있었다. 피곤도 하련만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신경써줘 너무 고맙다. 중간에 카니가와에서 갈아타고 그렇게 한 밤중에 토야마에 당도했다. 정말 긴 하루였다.

그러나 돌아보면 운 좋은 하루였다. 문제가 있었지만 모두 잘 해결된 운 좋은 하루였던 셈이다. 생각해보니 배 PD는 젊은 사람이 당찬 사람이다. 나이도 화경이와 동갑인데 하는 일이 여유가 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는 것이 여장부다. 짜증을 내는 법도 없다. 다양한 생황에 그때 그때 잘 대처한다. 내가 그 나이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말을 모르는데도 아는 단어 몇 개 붙여 말을 만든다. 대단하다. 며칠동안 적응한 것이다. 체력이 대단하다. 종일 먹지 않고 버틴다. 화장실도 안가고 버틴다. 내가 아는 여자중 제일 대단하다. 일을 추진하는 힘이 있다. 작품을 만들어가는 집요함이 있다. 화경이도 몸에 살을 붙여야 한다. 그래야 오래 버틸 수 있다. 배 PD가 산 증인이다.

아침에 7시에 얼람이 울렸지만 또 자다보니 아침이 10시까지라는 것을 알고 일어나니 9시반이다. 세수만 하고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여기 아침은 다른 곳과 사뭇 다르다. 음식의 종류가 도쿄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이 곳은 동경에서 보면 서쪽이니 한국과 가까운 곳이다. 못 보던 음식도 많다. 그런데 맛이 있다. 과일도 모두 신선하다. 지역의 차이일까 호텔의 차이일까. 16층에서 본 이 도시는 의외로 크다. 어제는 비가 왔지만 오늘은 햇살이 눈부시다. 오전에 잠시 자고 났더니 몸이 가뿐하다. 아직까지 몸이 잘 버텨주고 있다. 여기서 하루 더 머물고 내일 발표가 끔나면 도쿄로 이동하여 다음날 새벽에 한국해 비행기를 타야한다. 그리고 바로 독일행 비행기를 타야한다. 브레멘에 학회에서 발표하고 스튜트가르트로 이동하여 KBS 제작진과 합류하여 막스플랑크 연구소 취재하고 뮨헨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취재하고 그리고 귀국해야 한다. 그리고 하루 쉬고 또 미국 학회 출장이니 몸이 버텨줘야 한다.

지금은 그래도 여유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햇살이 좋아 나가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더 편하다. 저녁에는 오노가 식사하자고 한다, 이곳의 음식을 즐길 기회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바빠도 아니 바빠서 살아볼만한 인생이다. 죽으면 이렇게 바쁠 일 없으니 지금이 행복이다.

오후에 일에 집중하다 보니 여섯시 저녁 약속 10분전에야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부랴부랴 샤워하고 내려가니 오노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토야마는 바닷가라 스시가 좋다고 이미 좋은 식당을 알아놓았다. 스시는 조그마한 식당에 주방에 둘러앉아 먹었는데 아주 신선하고 입에서 살살 녹았다. 맛있다. 게란말이도 형형색색 자연음식을 이용해 색을 넣어 신기했다. 작은 식당이니 모두 빨리 먹고 자리를 뜬다. 손님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술도 팔지 않는다. 빨리 먹고 일어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젊은 친구이니 내가 재빨리 돈을 냈다. 둘이 먹었는데 3000엔 정도이니 아주 싼 편이다. 근처의 술집을 찾아 정종 한잔을 주문했더니 생선 요리가 나온다. 절인 조그만 생선은 살이 찌기는 했지만 맛은 멸치와 비슷하다. 굴을 신청했더니 자연산인데 엄청 크다. 생선 모양이 이상하여 불어봤더니 민물고기란다. 맛은 어렸을 때 먹은 맛이다. 이 돈은 오노가 낸다고 하여 양보를 하였다. 그의 자존심도 있으니까... 오늘은 어제와 달리 입이 호식하는 날이다.

오노는 나고야대학 젊은 친구다. 노벨상을 수상한 아마노교수 연구소 부소장이니 내가 그런 연유로 나고야 대학에 들렀다고 하니 왜 자기한테 연락을 안했냐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오노교수는 과거에 그런 자유로운 전통으로 나고야 대학이 지금 노벨상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 일본에서 젊은 사람들 중에 노벨상 받기는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이유는 일본 정부가 주는 연구비가 너무 목적을 제한하고 연구결과를 제출하지 못하면 실패로 다음 연구비를 받을 수가 없고 따라서 실현가능성있는 과제만 신청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뼈 아픈 지적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도 비슷하니 남일 같지 않았다. 그렇다. 정부관리는 실적을 위해 독촉을 하고 연구자들은 압력을 받는다. 자유스러운 분위기는 없어지고 뇌의 압력은 커지니 생각이 자유스러울 수 없다. 창의성은 자꾸 축소되는 것이다. 벤젠고리를 발견한 화학자 케쿨레의 꿈 이야기가 떠오른다. 꿈을 통해 벤젠의 공명고리를 생각했다는 그의 이야기가 부럽다. 그래서 꿈을 꾸라는 그의 충고도 우리에게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