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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을 보내면서 <2013.12.27 10:55:49>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12-27
  • 조회수1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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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zbxe/?document_srl=142658 에서 퍼옴.



정신없는 한 해였다.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렸다. 작년 말 연구소가 출범하면서 발목을 다쳐 이제야 겨우 스쿼시를 할 수 있을만큼 회복이 되었으니 내 몸이 회복되는 속도만큼 세월이 늦게 갔으면 하는데 내가 느끼는 세월은 그저 흘러간다. 세월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흘러간다.

지난 시간을 보면 그동안 많은 일이 진행되었다. 연구소를 출범시키고 장비를 구입하고 사람을 뽑고, 이사하고, 개소식하고, 새로운 연구과제를 공부하고 실험을 셋업하고....

이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연구가 지연될 뿐만 아니라 그 노동이 장난이 아니다. 실험실 신참들의 기여가 컸다. 특히 몸을 사리지 않고 힘을 쓴 신참들, 장비들을 제대로 작동시킨 고참들, 이사를 주관한 임박사 모두들 고마웠다. 난 출장이 겹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 이제라도 고맙다는 말 제대로 전하고 싶다.

정작 그렇게 바빴어도 실제 출간된 논문의 수는 예년에 비해 턱없이 적다. 내가 일을 적게 했을까. 아니면 게으름을 부렸을까. 아니면 다른 일에 바빠 논문 작성에 소홀히 했을까.

아니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다른 일에 바빴어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구에 노력한 한 해였다. 사이언스, 네이쳐등 어느 때보다 치열히 싸웠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하나는 살아있으니 나름 희망이 있는 한 해였다. 싸우면서 내가 더 단단해진 한 해였다. 숫자는 적지만 논문 하나 하나 최선을 다했다. 홈피를 보니 아쉬움보다는 오히려 논문 하나하나 우리의 노력이 들어가 있고 애착이 간다.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몇 년씩 고생한 데이터들이다. 더 좋은 저널에 가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가 게으르거나 생각이 부족한 탓이다. 논문을 쓴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목마르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연구목표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구는 아직도 더디기만 하다. 2차원 물질 합성의 길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 팀은 모두 연구 초짜다. 그런데도 나는 느리다고 짜증만 냈다. 어떻게 길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도 없으면서 그냥 짜증만 낸 한해였다. 논문을 많이 읽어야하는데 시간을 내지 못한 내 잘못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하는 시점이기도 하지만 이 방법으로도 아직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 못하고 있으니 여기에도 아직 길이 있을 것이다. 내년에는 연구인력을 보충해야 할 것 같다. 동시에 새로운 방법을 병행해야 할 것 같다.

그룹미팅의 성격이 바뀌어 아직도 이 방법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새로운 방법으로 학생들과 더 긴밀한 토의를 가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학생들과 더 긴밀한 토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다. 학생들은 지금의 방법을 통해 더 나은 토의가 이루어질까. 아니면 그냥 편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있을까. 효율을 올리지 않으면 결국 망한다. 정확히 판단해야한다.

CM 부분과 HCSC 부분은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져서 다행이다. 무리한 스케줄인데도 호주에 다녀온 것은 그쪽 진척상황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부분은 자신이 붙었다. 우리 아이디어라면 충분히 앞서갈 수 있다. 실험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한계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 채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이내에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타성을 바꾸기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몇 년동안 몸으로 읽힌 내 연구타성을 바꾸기가 쉬운 일인가.. 인내가 필요하다. 기다려줘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올해보다는 더 기다려주고 더 많이 대화하고... 더 힘들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것은 내가 몸으로 받아들이고 가야 할 것이다. 피할 수 없다.

이제는 또 신참들에게 시간을 써야하는 때가 되었다. 이사하는데 고생했다고 연구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신참들은 이제 새로운 장비를 다루어야 하고 새로운 연구주제와 고민해야 한다. 지금이 힘든 시간이다. 아직도 어떻게 연구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잘하는지, 어떻게 데이터를 정리해야하는지 어느 정도 정리해서 교수한테 보여주어야 하는지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두렵다. 그러나 하나씩 배우면 된다. 지금은 혼나도 되는 시간이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서의 메시지처럼 지금은 미미한 시간 그러나 졸업할 때 나의 모습은 달려져 있어야 한다. 데이터 정리, 실험노트 정리, 장비 배우기, 논문 읽기, 하나 하나 습득해 가면 된다. 나도 인내를 갖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너무 채근하지 말고...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어찌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일까. 몸으로 뛰고 있는 우리 실험실 식구들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때로는 선생으로서 꾸중하고 잔소리하는 불편한 관계지만 그래도 인생의 선배로서 모두 군소리없이 따라와 주는 것이 고맙다. 한없이 고마울 뿐이다. 어차피 내가 그들의 인생을 사는 것 아니지만 가치를 공유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더 나은 연구데이터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잠 안자고 싸우는 내 학생들이 때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대견스럽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모두와 같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의 이 행복을 모두와 같이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때.. 고맙다고 할 여유조차 없는 세월들이다. 언제가 우리 모두 웃으며 지난 날을 회고할 때가 있을 것이다. 박장 대소하며... 하지만 여기서라도. 모두 고맙다. 그리고 또 고맙다. 그리고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두에게, ‘그래도 우리는 희망이 있다, 포기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