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S Institute for Basic Science
Search

산다는 것 <2012.06.14 18:58:20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10
  • 조회수11462
  • 파일
내용보기

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12.06.14 18:58:20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짐을 싸야 한다. 이제 해외 출장이 익숙해져 짐을 가능한 한 적게 가져가려고 한다.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가는 것이다.

사는데 뭐가 꼭 필요할까...

머무는 날짜에 따라 양말과 속옷을 챙긴다. 아마 그냥 여행이라면 이런 것들도 개수를 줄일 것이다. 아니 양말도 필요 없을 것이다. 속옷도 빨면서 갈아입을 수 있으니 그 숫자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겉 옷 몇 개... 그리고 세면도구. 그리고 여권, 지갑, 여행일정서류. 그리고 컴퓨터. 그 이상 또 뭐가 필요할까...

처음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살면서 조금씩 자기 것을 쌓게 된다. 어렸을 때는 늘 가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지는 것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늘 빈 손으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어느새 나도 가진 자가 되었다. 가족이 생겼다. 땔 수 없는 관계를 만든 것이다. 스님들이 불자가 될 때의 어려움을 알 것 같다. 가장 큰일일 것이다. 내가 지금 훌쩍 떠난다고 생각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엇일까. 올 때 아무것이 없는 것처럼 갈 때도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무엇이 남을까. 나의 기억, 경험, 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도 결국 아무 기억도 남질 않으니 나라는 존재는 없다. 라마에서처럼 환생의 증거가 전생에서의 기억이라면 다르지만... 하지만 내가 지금 사라진다면 어머님에 대한 미안함은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의 거취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가진 자가 되었다고 생각한 시간들이었다. 10여년전 자리를 옮길 때 정말 아무 미련없이 옮길 수 있었다. 그 때는 내가 가진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옯긴다해도 잃을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옮긴다고 생각하니 생각이 복잡했다. 딸린 식구들, 장비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이니었다. 아니 어느새 내 짐이 커져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고 있었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고 아 이제 다 내려놓을 때가 되었구나 아니 그런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깨달은 적이 있다. 어차피 난 혼자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끊임없이 살을 불려 왔다면 간다는 것은 다시 살을 줄이는 과정일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관계를 다시 영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

며칠의 워크샾을 마치고 다시 나고야 공항이다. 여행은 육체를 고단케하지만 영혼은 자유롭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 생각 저 생각이 튀어나오고 얽힌 실타래가 하나씩 풀린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풍광들이 나의 생각의 틀을 깨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전에는 여행이 외로웠지만 이제는 이게 여행의 본질이구나 생각하게 되니 전혀 외롭지 않다. 아니 오히려 편하다. 생각이 정리되는 시간들이다.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 생각이 가는 데로 내벼려두면 된다. 잠이 오면 자면 되고 깨어나면 또 움직이면 된다. 그러다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또 다른 세계들을 공유하게 된다. 지구 저 반대편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같은 주제를 때로는 같은 방향으로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려 애쓴다. 나이와 문화를 차이를 떠나서... 이것이 내가 속한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3일동안의 학회지만 서두르지 않고 공격하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이 정리된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튀어나온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정리된다. 또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자리이기도 하다. 일본사람들은 조용하지만 항상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우리도 언젠가 이 사람들처럼 조용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깊이가 있는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변환기다. 무엇인가 요란을 떨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면 또 조바심이 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구비도 주어지지 않으니 어찌보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렇게 오래 갈 수는 없다.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후배들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한 인간으로서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지만 한 연구자로서 그래도 우리가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내가 숨쉬면서 가지는 유일한 소망이다. 하기야 그것도 내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그래도 내가 이직 숨쉬고 있으니 이 정도의 욕심은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