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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2011 <2011.09.14 11:22:19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10
  • 조회수1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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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11.09.14 11:22:19



중국 북경에서 열리는 chinanano2011과 천진공과대학에서 세미나등 빠듯한 일정을 마치고 전날밤 돌아와 피곤함이 쌓인 채로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탔다. 조사장이 공항에 직접 배달한 생갈치 때문에 변할까봐 할 일이 밀려있어도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약속한 아침 9:30 기차를 탔지만 늦잠을 자고 겨우 택시를 타고 기차를 타느라 기차표를 살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피해갈 수 없었다. 차표검사로 기차표를 1.5배를 냈다. 언젠가 공짜로 간 고향길 표 값을 지불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옆에 계신 할머니였다. 손주들을 데리고 고향길을 가는 모양이었다. 기차표값이 11만원이 나왔는데 할머니는 지갑을 보여주면서 다 털어 수 만원을 냈다. 내가 보기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다. 차장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표를 내어준다. 옆에서 보는 내가 웃으며 불평을 했더니 ‘아저씨 지갑을 제가 봤습니다.‘ 하면서 못 깍아 준단다. 한가위의 풍성함이 차장 아저씨의 마음을 풍족하게 만들었을까. 차창 밖에는 오락가락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푸른 산과 푸른 들판이 내 마음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가 곳간 옆에서 깨를 고르고 계셨다. 자식들 오면 줄 참기름 들기름을 미쳐 준비를 못하니 그동안 벌레가 많이 생겨 벌레를 고르고 계셨던 것이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하려는 본능일것이다. 오랫동안 병원에 계시면서 몇 번 고비를 넘기셔서 기력이 많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사이 기력을 많이 회복하셨다. 이제는 또 혈압이 문제여서 병원에 계속 계셔야만 했었다. 젊었을 때부터 드셨던 혈압 약이었는데 무심한 자식은 그것조차 몰랐던 것이다. 옆에서 마누라는 마늘을 까느라 바쁜 손길을 움직이고 있었다. 추석근처에 마늘을 심어야 하는데 병원에 계신 동안에도 마음을 쓰신 것일 것이다. 추석이면 누이가 내려와 마늘을 심으신다고 했으니 이미 준비를 하시는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누이 부부가 보통은 그 전날 내려오는데 밭일 때문에 그날 저녁 내려오셨다. 내 어렸을 적 그 가난하던 시절 4명의 가난한 처동생과 가난한 시댁에 자기도 못살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먹을 것 부쳐주고 엄마한테 용돈주시던 매형이다. 세상에 어디 그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도 엄마를 그렇게 위해 주신다. 본인 몸도 불편한데 처갓집일은 혼자 다 하신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누이와 함께 이미 텃밭을 파고 계신다. 늦게 일어난 나도 밭에 나갔지만 고랑 파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배수구를 살피고 물이 빠지도록 삽으로 고랑을 파고 100평도 안되는 작은 밭이지만 마늘 밭을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이 있다. 땅을 파기 전에 거름을 줘야 한다. 요즈음은 천연거름이라 냄새도 고약하다. 그리고 땅을 파야한다. 비온 뒤라 땅은 부드러웠지만 신발에 모두 흙이 달라 붙어 발이 무겁다. 그 땅을 모두 매형이 팠다. 신체 부자유한 매형이지만 몸을 아끼지 않는다. 멀쩡한 나는 허리가 아파 절반은 쉬고 있다. 깻대를 모두 걷어내고 풀도 모두 걷어낸다. 그리고 쇠스랑을 이용해 땅을 바순다. 그 사이 옆에서 누이와 엄마는 마늘을 준비하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그렇게 하고 나니 배가 고파 아침이 꿀맛이다.

아침을 먹고 한숨을 자고 나니 조카부부가 오고 두 동생 식구들이 모였다. 모처럼 보는 조카들 얼굴이 사랑스럽다. 새로 태어난 조카의 딸이 벌써 8개월이 되어간다. 얼굴을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안기니 온 식구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할아버지가 된 셈이다. 이제 고2가 된 두 조카녀석들은 몸은 우람하지만 아직도 아기들처럼 순진하다. 초원이는 가끔 말썽을 부리지만 밤늦게 혼자서 할머니 병문안을 올 만큼 속 깊은 아이다. 애 엄마는 그런 아이를 불안해한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되는데... 아무 일없이 자랄텐데... 하긴 그것이 우리의 한계다. 나도 마찬가지다. 조금 기다려주면 될 것을... 그러면 다들 성숙하게 될텐데... 벼가 익는데는 가을까지의 긴 시간이 걸리는데 한 여름 왜 익지 않느냐고 성화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학생들에게도 더욱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내 나이 이렇게 먹었는데도 난 아직 멀은 것이다!

날씨가 꾸물하여 저녁에는 보름달을 보지 못했다. 구름사이는 자나가는 달을 보긴 했지만 한가위의 풍성함을 주진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함으로 가득차 있다. 얼마전 엄마 병원에 들려 엄마와 같이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제까지는 내가 보살핌을 받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런 나의 마음은 부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닌 따스함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가난한 집에서 그 고생을 다해 우리를 키워주신 엄마를 생각하면 어떻게 지금까지 도망가지 안가고 사신 것인지 내 눈으로 보면 신기하다. 요즘 시대 같으면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그런 엄마가 고맙고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이제는 엄마한테 내가 친구가 되어드려야 한다. 전보다 더 다정하게 엄마와 이야기할 수 있고 더 자주 전화할 것이다.

추석날 아침에 모두 늦잠을 잤다. 전에 아버지 계실 때에는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제사준비를 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더구나 날이 흐리니 모두 늦게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의 이야기일뿐 밖을 보니 이미 누이와 매형은 마늘밭 비닐을 씌워 놨다. 그리고 이미 마늘을 심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난 머쓱하여 주위만 왔다갔다 거드렛 일만 한다. 아침이 너무 늦어 엄마가 시장해 하셔서 모두 아침을 먹고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제는 내가 대장이니 요령도 부려본다. 아버지 계실 때까지 해오던 제사도 엄마가 며느리들 고생한다고 없애셨다.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지만 엄마가 원하는 것은 그대로 들어드리기로 했다. 아침 예배시간동안 (아침도 아니지만...) 모두 감사의 일들을 같이 나누는 것이 이제는 전통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가족 전체가 앉아 소통의 시간을 가지니 모두에게 서로의 생각을 아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엄마가 말씀하시기로 되었지만 말씀대신 감사의 기도로 모두가 마음이 찡했다. 어려운 때 포기하지 않고 극복한 엄마가 대견스럽다. 이제는 내가 힘이 될 것이다.

정오가 지난 다음에야 산소를 갈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화장후 모두 한 곳에 합장되어 있어 가기가 편하다. 세 아들과 세 손주들만 단초롭게 다녀왔다. 이런 전통도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모른다. 작은 아버지 묘가 여기 있는데도 작은 집 식구들은 이제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런 전통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오후되어 이번에는 고추닦기가 이어졌다. 60여근이나 되는 고추를 모두 깨끗이 닦아야 된단다. 온 식구가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같이 작업하니 지루한 작업도 몇 시간이 걸쳐서 끝이 났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전에는 엄마가 혼자 모두 하셨다는 것이다. 자식들 깨끗한 고추를 먹이기 위해 아는 곳으로부터 좋은 고추를 구매하여 말린 후 쌓인 먼지를 모두 하나씩 닦아내는 것이다. 모두들 그동안 이런 과정을 통해 고춧가루가 장만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마한테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시골을 떠나 사는 우리들이 까맣게 잊고 산 사실들이다. 내가 노동하면서 느끼는 지루함, 육체의 고통을 느끼며 동시에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져 온다.

세상을 살면서 조금 더 멀리 봐야 할 것 같다. 아이들 발달이 느려도, 행동이 느려도, 지적인 사고 능력이 떨어져도,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이 개성이고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서둘러서 되는 것이 없다. 기다리고 인내하면 모두가 갖고 있는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내 역할은 그저 그 능력이 깨어날 때까지 인내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 뿐...... 추석이 내게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