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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와 과학 <2011.04.30 15:12:00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9
  • 조회수1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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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11.04.30 15:12:00




얼마 전 노인 병원을 방문한 한 신문기자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 고스톱을 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과 10원짜리 동전이 가득한 돈주머니를 목에 건 고스톱 선수의 모습이었다. 보통 노인들은 고스톱을 천천히 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이 할머니는 무섭게 빨리 친다고 했다. 그래도 돈을 따니 선수임에 틀림없다. 기자가 들어가자 젊은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봤고 나올 때도 또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것을 보면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틀림없지만 분명히 고스톱 선수이기도 했다.

어제는 은선이와 지경부 과제발표에 갔다 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선이는 실험실 생활에 기복이 많다. 정말 성실하고 잘하는 아이지만 실험결과가 신통찮으니 당연히 자기 능력에 회의가 든다. 그래서 그만둘까 하고 망설이고 여러 가지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따라서 오히려 연구능력은 안 올라가고 결국은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 고리를 끊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운 좋게 그동안 좋은 연구결과가 나오면 이런 시련을 극복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본인이 일단 이 고리를 끊어야 일의 능률이 오르고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어디 은선이한테만 국한되는 일인가. 어찌 보면 연구하는 모든 대학원생한테 해당되는 일이다.

아니 이는 단순히 대학원생한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요즘 사는 젊은이들 모두 고민이 많은 세대다. 아마도 일자리가 적어서일까... 그래서 모두 취업걱정이 많은 것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젊은이의 특징이 미래에 대한 불안이고 또 역설적으로 그래서 미래가 더욱 창창한 것이다. 틀림없는 것은 꼭 이 시대가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은 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요즘 세대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 모든 것을 치밀히 계획 세우고 실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걱정과 다르다. 걱정은 당연히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걱정은 우리의 집중력을 저하시키고 심지어 정신병에 걸리게도 한다. 아마 이것도 당뇨병처럼 현대인이 겪는 병중의 하나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그저 불확실의 연속이다. 아무리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도 과연 한치 앞을 알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다 발이 삐어 계획한 것이 모두 무산이 되기도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아니 어쩌면 신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지혜를 허락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교만에 빠져 우리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미안하지만 아무리 해 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왜? 누구도 모르니까. 사람의 목숨도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세상을 사는 지혜란 그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사는 것이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농담이 있다. 골프는 잘 치는 사람이라도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점수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다. 전날 잘 쳤다고 다음에 잘 되리라는 기약이 없다. 그래서 잘 치는 사람은 아무 생각없이 볼 하나하나 치는 순간에 집중한다. 볼을 치는 그 순간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치다 보면 새로운 스코어도 탄생하고 역사도 쓰여지는 것이다.

치매는 어찌보면 이렇게 고민하고 사는 우리 인간에 대한 우리 몸의 반란인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리 고민하고 살다보면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한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뇌의 기억의 대부분을 지워버리고 아주 순간적으로 작동하는 뇌의 기능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몸을 살리는 것이다. 고스톱치는 할머니가 방문자가 어디 출신인지 한 시간을 기억 못해도 순간적으로 머리 회전이 필요한 고스톱은 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오늘 하루, 아니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는 명제이다.

이런 원리는 우리 과학자에게도 통한다. 우린 일생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운다. 대학원까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배움으로 해서 우리도 모르게 매너리즘이라는 것에 빠져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내가 배운 과학의 틀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틀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래서 과학지식이란 것은 배우는 순간 모두 잊어야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야 창의적인 생각으로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 말하자면 우리 모두 과학지식에 대해 치매가 걸려야 한다.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치매 걸린 할머니처럼 다시 아이처럼 원초적인 질문을 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