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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다는 것 <2011.02.09 16:38:28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9
  • 조회수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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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11.02.09 16:38:28



산더미처럼 곳곳이 쌓여있는 서류들이 무척 눈에 거슬렸지만 정리할 틈이 없어 놔 둔 것이 늘 마음에 걸려 해가 바뀌어 오늘 드디어 방을 청소하기로 했다. 찾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면 치울 때가 된 것 같다. 전에 언제 청소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쌓인 서류의 두께를 보면 몇 해는 될 것이다. 교수가 된 이후로 이사를 벌써 다섯 번째다. 그럴 때마다 많이 버렸지만 아직도 책꽃이는 책이 가득하다.

혼자는 도저히 엄두가 안나 현미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들어오던 수민이도 합류하여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책꽃이 하나를 정리해도 쉽지는 않았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 지나간 문서들도 많아 쉽게 버릴 수 있었지만 지난 학회 기록들은 망설였다, 그러나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국제학회만 남겨두고 모두 버리니 책꽃이가 가벼워졌다. 불필요한 저널들도 모두 버리기로 했다. 처음 교수가 되어 열심히 공부했을 때 차곡차곡 모아둔 논문 꾸러미들 그동안 차마 아까워 못 버렸지만 이번에는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이미 다 읽기도 했지만 찾으려면 또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아까워 실험실과 관련된 기록들은 그대로 보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나마도 나중에는 버려질 것들일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현미가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는 서류 덩어리를 버릴까 하고 물어봤다. 내가 박사동안 짜 두었던 피땀어린 프로그램들의 hardcopy들이다. 지금은 테잎은 있어도 읽을 수가 없고 그것 밖에 남아있지 않다.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지만 그것은 버리기 어려웠다. 언제 또 보랴 싶지만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동안 전에 이론하면서 쌓아두었던 매뉴얼들은 모두 버리기로 했다. 버전이 낚아 이제는 모두 쓸모없거나 모두 소용없는 물건들이다. 졸업생들의 졸업논문집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것들은 내게 소중한 재산들이다. 컴퓨터에 관련된 책을 버리니 책꽃이가 훨씬 가벼워졌다. 그렇게 남겨진 빈 책장을 보고 있노라니 아쉬움보다는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래 이곳을 새로운 것으로 채울 것이다. 아마도 생물학 부분이 많이 채워지지 않을까. 무엇이든 좋다, 그저 비어 있는 것만으로도...

각종 학회관련 CD들도 모두 버리기로 했다. 그동안 아까워 재활용을 위해 쌓아둔 상자들, 가장들 모두 버리기로 했다. 빈 술병들도 버리고 그동안 받은 상패집들도 상패만 남겨두고 모두 버리니 책장의 공간이 더욱 넓어졌다. 상장들도 한곳에 쌓아두어 정돈했다. 진작 이럴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상패는 그나마 나의 허영심이다. 아직도 나의 허영심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다 버려도 나의 땀이 어려있는 논문 관련된 것은 버리기 어렵다. 아마 내가 숨이 붙어 있는 한 붙잡고 있어야 할 부분이다. 대학원 때 배웠던 과목들에 관한 숙제들, 노트들 또한 버리기 어렵다. 이 부분은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버릴수록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버리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다. 또 내가 죽을 때도 그냥 죽는 것보다는 준비하고 정리하고 죽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공수래 공수거라 했던가.. 그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지만 내가 남긴 흔적들, 아쉬움등을 없애는 것이 가는 길이 더 가벼울 것이다. 내가 태어나 지구의 엔트로피를 올렸지만 줄이고 갈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은 백번 성공한 거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원상태에 가까운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족한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아마도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첫 번째 단계인 것 같다. 늘 버리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 우리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