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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hip <2010.04.12 16:49:10>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9
  • 조회수1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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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10.04.12 16:49:10



요즘 논문을 보면 전하곤 달리 저자가 혼자인 경우가 거의 없다. 전에 내가 있던 학교의 교수 하나는 논문을 혼자 제출했다가 에디터가 왜 저자가 혼자이냐고 물어보니까 자기 집 고양이 이름을 썼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입자물리 실험의 경우 저자가 500여명이 되기도 해서 4페이지 논문에 한 페이지가 저자 이름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고양이 이름을 쓴 경우도 그렇지만 500여명의 저자 속에 들어있는 이름 중 과연 각자의 기여도가 얼마나 될까. 아마 어떤 사람은 자기 논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얼마 전 황 교수도 청와대에 있는 과학 보좌관 이름까지 저자에 넣어 항간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게는 내용이야 어떻든 이름만 들어가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고양이 이름을 넣을 만큼 하찮게 여긴다.



사실 연구자에게 저자 여부, 논문의 기여 여부는 아주 중요하다. 얼마 전 일본의 핵물리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은 동료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 같이 저자로 들어갔다가 같이 노벨상을 받았다. 그 논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영어로 쓰도록 도와준 사람의 눈도 대단한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그 한 논문으로 연구가 끝났다면 공저자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요즈음은 노벨상 수상자의 학생이나 공동 연구자로 일한 한국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연구 수준이 올라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저자가 꼭 노벨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기여도가 중요한 것이다. 노벨상을 결정하기 전에 노벨 위원회에서는 각 개인에 대해 기여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오늘날의 연구는 갈수록 복잡해져 뭔가를 이루어내기에는 공동연구가 필수적이다. 유명한 연구 그룹은 포스트닥만 해도 50명이 넘는 특별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같은 그룹 내에서 공동연구란 때로는 경쟁을 유발시키기도 해서 연구원들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기도 한다. 많은 경우 대부분이 한 주제에 몇 명이 붙어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책임자가 공저자 여부를 결정한다. 또 고가의 실험장비를 한 실험실에서 모두 갖추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다른 그룹과의 공동연구는 어찌 보면 필수적이다. 이런 경우 저자 여부는 양쪽의 책임자가 결정하여 상대적으로 쉽게 결정할 수 있다. 이 경우 두 그룹의 책임자간의 인간적인 이해가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그룹간 공동연구의 경우 주제의 일치성에 의한 관계라기보다는 인간의 이해에 기초를 둔 공동연구가 성공률이 높다. 이것도 사람의 일이라 일을 하다보면 충돌이 많이 일어나게 되고 이 경우 서로간의 이해와 양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충분히 경험한 바이다. 이런 문제는 같은 실험실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적으로 서로 이해하면 자연히 많은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누게 되고 따라서 공동연구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위 배짱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주제가 같더라도 쉽게 틀어진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히 학생들과 연구원이 같은 주제를 갖고 연구할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 대게는 교수가 연구 주제를 정하고 아이디어를 주관하지만 실제 일은 학생들이 도 맡아서 한다. 특히 굳은 일은 학생들의 몫이다. 모든 데이터를 얻는 것도 학생들이다. 보통의 경우 교수가 데이터를 공유하고 학생들과 논문을 쓰게 되고 이 경우는 저자 문제가 없다. 학생이 제일저자, 교수는 교신저자가 되고 나머지는 기여도에 따라 저자 순서를 정하면 된다. 그러나 가끔은 학생들이 논문 쓰는 것이 서투르고 일의 시급함 때문에 연구원이 서둘러 논문을 쓰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연구원도 고정직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제일저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 경우 학생들이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일은 자기가 다 했는데 왜 제일저자가 되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다. 이 경우 둘 중 하나가 양보하면 되지만 최악의 경우 서로 불화가 일어나 같이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학생들 간 공동연구주제를 갖고 일하는 경우 불화가 발생할 여지가 더욱 크다. 각자 시간이 갖는 제한, 능력의 제한 때문에 어떤 사람은 더 빨리 가고 어떤 사람은 더 늦게 간다. 여기에 선 후배의 관계가 얽히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된다. 우리 실험실 전통은 각자가 개인의 연구주제를 갖고 연구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거의 없지만 회사 과제를 진행하는 경우 제한된 기간에 답을 내야 하는 조건 때문에 같은 소그룹내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여러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서로 도우면서 답을 찾아낸다. 이 경우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교수가 독단적으로 밀어 붙이거나 선배가 후배를 관리하는 방법이 있지만 우리 실험실의 분위기는 연구에 대한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서로가 원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이런 경우의 해법은 따로 떼어 독립적으로 일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같이 일하면 일의 능률이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일저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연구를 하는 경우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아이디어를 냈느냐이다. 그렇다고 아이디어 주창자가 반드시 제일저자가 되어야 하느냐.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일을 하다보면 원래의 아이디어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수가 있어 이런 과정은 실제 실험을 진행하는 학생들의 역할이 아주 크다. 두 번째로 실제 일을 하는 학생들이 제일저자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기초지식이 없어 초기에는 아이디어를 낼 수 없지만 교수의 지도로 모든 데이터를 만들어내고 수정하고 최종 결론을 교수와 같이 얻게 된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교수가 논문을 학생하고 같이 쓰게 되면 최종적으로 일이 끝나게 된다. 그러나 만일 학생이 논문을 직접 쓰지 않고 같이 공동연구를 하는 사람이 쓰는 경우는 누가 제일저자가 되어야 할까. 논문을 쓰는 것은 내 경험을 보면 가장 고통을 감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논문을 거의 300여편 써 왔지만 지금도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논문을 쓰는 사람의 몫도 상당하다. 따라서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관계를 처음부터 상의하고 가는 것이다. 서로간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그것을 보완하는 쪽으로 서로 이해하면 문제가 없다. 운 좋게도 이제까지는 그렇게 극복해 온 것처럼 보인다. 좋은 사람들 덕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내가 방문교수로 가 있었을 때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때 나는 이론 연구를 하고 있었고 주로 상대교수와 내가 일대일로 주제를 정하고 일을 내가 진행시켰다. 그 쪽 사정이 익숙치 않아 그 방에 있는 포스트닥한테 컴퓨터, 그래픽 그림 그리기등에 관한 도움을 받았다. 나는 교수라 제일저자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당연히 논문을 쓸 때 포스트닥 이름을 제일저자로 넣었다. 물론 일을 하는 것, 논문을 쓰는 것, 제출하는 것도 모두 내 몫이었다. 두 번째 논문도 그렇게 하자 상대 교수가 제동을 걸었다. 논문을 쓰는 사람이 제일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경험은 나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포스트닥의 미래를 생각해서 그를 제일저자로 삼으려 한 나의 의도는 때로는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연구를 내가 모두 수행했기 때문에 내가 다 이해하는데 만족했고 저자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삶은 때로는 제한적이다. 실험실에서 주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을 자주 만날 기회가 없고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이다. 나는 공동연구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다. 장비 회사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얻은 친구가 조사장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평생 친구 삼기 힘들 것이다.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학교 내에서도 바빠서 교수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못한다. 공동연구는 서로 간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런 연구자들 사이에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가끔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틀림없이 저자 문제가 주된 문제가 되고 서로의 기여정도, 아이디어의 도용등이 원인이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저자에 대해 미리 합의하고 가면 단기적으로 실수가 없다. 장기적으로는 서로간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정직해야 하고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그래서 가끔 술도 마시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장기적인 공동연구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실험실 사람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평생 서로 공생관계에 있을 사람이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더라도 늘 서로 얼굴보고 살 사람들이다.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손익을 따져봐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 중에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다. 자기 일에 집중하기 보다는 남의 이야기에 더욱 열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서로를 감싸주기 보다는 비난을 먼저하고 따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하나의 사회인 것이다. 실험실이 크다보니 이런 갈등이 더 많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 잘하지 못하면 사회에 나가서는 더 힘들다. 여기는 실수해도 용서가 되는 교육집단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실험실 분위기가 무겁다.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 스스로를 한번 더 돌아보아야 한다. 옆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비난할 때 동조보다는 귀를 닫을 지혜도 쌓아야 한다.



생각해보라. 살면서 내가 누구와 제일 많이 만나는지... 사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잃지 않으면 내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내 수준으로) 불행히도 다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다. 나를 후회하게 만든다. 특히 실험실에서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프다. 내 가슴 한 부분은 늘 그들 몫으로 비어 있다. 내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비어 있을 것이다.



최근 이런 문제 때문에 실험실에 어려움이 생긴 것 같다. 내가 시간을 같이 많이 못해준 것이 제일 큰 원인이다. 소그룹미팅 시간도 제대로 내지 못하니 갈등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무겁지만 또 각자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그것은 희망이다. 각자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믿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과학과의 문제 때문에 학생을 더 받아야 하는 나도 난감하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