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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2009.05.14 22:55:19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9
  • 조회수1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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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9.05.14 22:55:19


산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단 며칠의 우아한 봉우리를 드러내기 위해 목련화도 그 긴 겨울을 앙상한 가지로 버티어 내야 하고, 늦봄 그 화사한 철쭉의 무리도 무딘 수채화의 색깔로 온 겨울을 기다려야 한다. 라일락 꽃은 5월의 그 진한 향기를 위해 긴 겨울을 버티고도 또 봄내 꽃을 피우지 않고 5월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려 함일까.



요즈음 사는 것이 인내와의 싸움이란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연구란 것도 내가 마음 먹은 대로 결코 되지 않는다.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갖은 모델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머릿속에서 수 많은 구탕겐 실험과 수 많은 실험의 시행착오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개념이 태어나는 것이다. 머리 속이 정리된 개념조차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지... 일주일 이주일, 한달 두달을 버텨도 답이 안 나온다...


논문을 쓴다는 것 또한 얼마나 기다림의 연속일까.. 쓰고 또 고치고.. 그러기를 수십번 나중에는 보기도 지겨워진다. 늘 같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잘못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때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고 때로는 다 잊고 다른 하다가 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 또한 기다림을 이기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작업인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와 길게는 5년을 버텨야 하는 과정 또한 기다림의 연속이다. 젊은이들에게 생각하면 학부를 졸업하고도 또 다른 5년의 세월은 너무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이인생의 황금기간을 고스란히 실험실에서 보내야 한다. 가끔 강남의 거리에 나가보면 젊은이들의 홍수다. 그들의 얼굴에는 별로 인생의 고뇌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 실험실에서 버티는 우리 학생들이 정말 대견하게 느껴진다. 아마 연구를 즐겨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다면 대학원 생활이 정말 지겨울 것이다. 설사 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지루함을 이기는 것은 또한 다른 문제이다.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내 스승은 그래서 연구가 구도자의 길과 같다고 그랬다. 실감이 간다. 실험실에서 연애하는 학생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다. 인생이 어차피 외로움의 연속이지만 그렇게 서로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렇게 학위가 끝나도 평생을 그렇게 풀리지 않는 문제와 씨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또 그게 없으면 우리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 또한 부인하지 못한다.


세상 일이란 또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내버려 두어 제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모든 것이 비논리로 돌아갈 때도, 또 제대로 돌아가기 힘든 것처럼 보일 때도 때로는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약이라는 우리 속담이 정말 맞는다고 느끼는 것이 요즈음의 심정이다.



사람의 마음도 늘 그렇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이해한다 싶으면 저 멀리 멀어지고 또 멀어진다 싶으면 가까이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사랑한다 싶으면 어느새 저 멀리 있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사랑이다. 정말 기다림이 가치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기다려 행복한 것이 있다면 기다려 불행한 경우 또한 다반사인 것이 우리 인생이다.



젊었을 때는 기다림이 죽어도 싫었지만 이제는 기다림이 인생에 있어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좋은 연구결과도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들도 결국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사인 것을. 그래도 이제는 뜨거운 가슴, 분노를 추스리고 기다리는 요령도 생겼다. 가슴 속에 부처를 담고 사는 것이 이 험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주어진 생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 나머지는 기다리는 일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