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S Institute for Basic Science
Search

정리 정돈 <2008.12.15 13:01:53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9
  • 조회수14219
  • 파일
내용보기

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8.12.15 13:01:53

요즘 내 방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책상 위가 잘 정돈되어 있고 벽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기 때문이다. 전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내 사무실은 어지러움의 대명사이다. 책상 4개에 책이나 서류들이 아무렇게나 널려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부족해 널려있는 것들이 위로 쌓이게 된다. 책상 앞에는 온갖 종류의 메모지가 붙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난 이런 어지러움이 편하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찾아낸다. 아마도 내 마음속의 저변에는 창의적인 생각은 잘 짜여진 규칙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어지러움을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나를 모르는 학생이나 비서들은 내 책상을 정리해 놓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대게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찾지 못해 짜증을 낸다. 사실 이런 식의 엔트로피 증가도 결국 한계는 있다. 내가 물건을 찾는데 5분 이상이 지나면 나도 이런 자유분방함을 포기하고 정리하게 된다. 정리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대게 버리면 된다. 내 마음 속에 포기하지 못한 것들도 어느 한 순간 그렇게 포기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내가 없으면 연구실이 안 돌아갈 것 같지만 상당히 긴 해외 여행 동안에도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간다. 내가 죽어도 지구는 아무 일 없는 듯이 돌아간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사실 정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실험을 잘 해놓고도 데이터를 잘 정리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과학은 기록과 커뮤니케이션의 산물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관측한 결과를 분석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경우 실험노트를 잘 정리하는 사람은 대게 잘 체계화되어 있다. 왜냐하면 실험노트를 기록하는 동안 이미 스스로 머릿속에 정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실험을 하면서 실험노트 작성을 부실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특히 컴퓨터 의존도가 높아 실험결과도 컴퓨터에 기록하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다. 첫째 과학은 기록의 산물이고 본인이 실험실을 떠나도 다음 사람이 실험을 이어받기 위해 남겨진 실험노트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실험실에서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허 박사다. 아마 이런 것들은 서로 배워야 할 것이다. 논문 발표를 하는데도 준비를 잘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많다. 이번 학기 보람이의 석사 논문이 잘 준비한 대표적인 예이다. 몸이 아픈 가운데에서도 발표 자료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고 발표도 꼭 할말만 원고를 준비해서 발표했다. 영어에 익숙지 않으니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대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발표 자료를 홈피에 올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우리 실험실은 또 사람이 많아 생기는 문제가 많다. 그 중 단연 으뜸은 실험실 정리다. 전에 있던 학생 중 어떤 학생은 실험 후 지나간 자리만 보아도 누가 실험했는지 잘 알 정도로 어지러워져 있다. 비이커는 싱크대에 그냥 널 부러져 있고 설사 씻었다 해도 말리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다. 이 경우 다른 사람이 실험하려 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런 일은 전염병처럼 다른 후배들이 따라 하게 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측정장비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측정이 용이하도록 측정 후 케이블을 다음 사람이 쓸 수 있도록 정리해 놓는다. 시료도 아무렇게나 두지 않고 자기 자리에 놓는다. 자그마한 드라이버 하나도 쓰고 난 후 제자리로 돌려놓는 노력은 우리 실험실처럼 실험실이 여러 군데 퍼져 있는 경우, 또 지금처럼 실험실 사람이 많은 경우 정말 중요하다. 이런 습관은 늘 조심하는 습관이기 때문에 안전사고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노력은 서로간의 작업효율도 향상시키지만 서로간의 인간적인 신뢰 유지에도 아주 중요하다. 뒤처리가 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불평을 키우고 결국에는 신용마저 잃게 된다. 회사에서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당연히 따돌림을 받게 되고 상사들의 눈을 벗어난다. 이것은 최악이다.
이 문제는 내가 전에도 여러 번 언급했던 문제이다. 그러나 실험실이라는 것이 늘 새로운 학생들로 채워지다 보니 이런 부분이 지속성이 없다. 따라서 이런 부분에서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 실험실의 또 다른 문제점은 실험실에서 오랫동안 연구해 온 연구원들이 이런 잔소리를 안 하는 것이다. 실험실 짱도 성격상 이런 말을 못한다. 결국은 불만이 높아가고 심해지면 실험실을 떠나는 일이 발생한다. 잔소리의 몫은 고스란히 내 몫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무책임한 태도다. 실험실에서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한 사람은 평소에 훈련이 안된 탓도 있지만 실험실에 대한 애착 부족이다. 주인 의식이 없는 것이다. 옆에서 이런 것을 보고 잔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도 이런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지적해 주어 고치는 일이다. 이것만이 우리 실험실을 발전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실험실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두가 적극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