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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로다 <2008.08.23 11:52:42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8
  • 조회수17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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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8.08.23 11:52:42


어제는 저녁 늦게까지 회의하고 머리가 아파 집에 들어갔다. 인도친구가 와서 세미나를 해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토요 그룹미팅을 할 자신이 없어 미팅을 취소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천근만근이다. 이렇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러닝머신에 올라갔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별 신통치 않아 그냥 두었는데 우연히 라디오 방송 진행자 이숙영씨가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아침 방송이라 항상 활기차게 진행하려고 한다 했다. 가정에서 싸움을 하고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해 병원에서 울어도 방송에 나오면 즐겁게 마음을 바꾸어 방송한다 했다. 자기는 프로니까 그래야 한다고 하면서 고충을 말했다.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이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는 프로다. 방송진행자도 프로의식을 갖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렇게 내가 아이들을 가르쳐 놓고도 난 정작 이렇게 헤매고 있다. 나는 프로다. 전 세계 연구자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프로인 것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쳐 이 나라가 경쟁에서 뒤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프로인 것이다. 바보같이 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이 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래 비록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 날보다 더 많은 나지만 난 아직도 불완전하다. 내 마음속의 이기심 또한 나고 아직 누구 한사람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나지만 그게 나인 것이다. 아직도 감정 통제가 안되는 게 나고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나다. 그런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난 프로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그리고 이런 것을 죽을 때까지 추구하는게 내 직업이고 천직이다. 그래서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언제나 싸울 대상이 있다는 것이 우리 직업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 어떤 상황에도 이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 난 사람 사는 법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람사이에서 어울려 살면서도 아직도 깨지기 쉬운 어린 아이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지만 그게 나인 것이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 또 부딪치며 여전히 어렵게 느끼면서 살지 모른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 명제가 있고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내가 때로는 상처를 주지만 나 역시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그들 역시 나를 필요로 한다. 적어도 아직은..

지난 일주일은 내게는 악몽이었지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나 때문에 많은 불편함을 겪었을 것이다. 교수란 작자가 얼굴에 힘들다고 쓰고 다니고... 어린애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나를 구태어 감추고 싶지는 않다. 그게 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들이 고맙다. 멀리 있는 승열이는 나를 위해 영시도 보내주었다. 페이는 진심으로 따뜻한 편지를 보내주었다. 모두들 말은 안하지만 걱정스러운 눈길들 하나하나 모두 고맙다. 그렇다. 나 비록 불완전하지만 이런 불완전함으로 앞으로도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비록 거칠어 때로는 상처를 줄지라도 그래도 그런 미숙한 사랑일지라도 여전히 내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싶다. 그런 미숙한 마음속에 부레 옥잠화 한 무리를 키워 조금씩은 거칠은 내 마음을 달래야겠다. 그래도 옥잠화로 내 마음 전체를 채우기는 싫다. 내 마음속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비록 거친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텅 비어있는 마음보다는 나으니까. 내 비록 상처받을지라도 이 거친 사랑으로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고 싶으니까. 이 가을을, 다시 오지 않을 이 가을을 내 마음속에 느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