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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 묻거든 <2008.07.23 12:57:05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8
  • 조회수1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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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8.07.23 12:57:05

매년 가는 지리산행이지만 갈수록 어려움을 느낀다. 지리산행은 힘들지만 늘 가는 이유는 두 가지 목적에서다. 하나는 실험실에서 3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늘 같이 생활해도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말하자면 인간적으로 서로 이해하는 기회를 갖고자 함이다. 이러한 경험은 힘든 실험실 생활 중에도 나중에는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다. 또 하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며칠동안 험한 산을 끝없이 걸어야하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나름대로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할 시간을 갖는다. 우리는 바삐 살면서 사실 자기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 힘들다. 나 역시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젊은 우리 실험실 학생들의 경우는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 식구가 산행을 하다보면 늘 뒤에 쳐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산행에는 중학교 2학년인 조카 진성이와 체육관에 같이 다니는 명환이가 합류했다. 명환이는 평소에 운동을 하고 체격이 다부져 걱정을 안했지만 진성이는 덩치만 컸지 사실 운동을 하지 않은 아이라 걱정이 되었다. 아니라 다를까 진성이의 불만은 도를 넘어섰다.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기가 힘든 까닭이다. 그 불만중 재미있는 질문은 이렇게 힘든 산을 왜 가지? 하는 것이었다. 명환이도 힘들었는지 이런 산을 왜 몇 번씩 가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은 사실 우리가 살면서 가끔씩 잊고 사는 질문이다. 어느 시인의 싯귀 중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 하는 대목이 있다. 선문답 적이다. 사실 이렇다 할 대답보다는 이 질문이 갖는 함축성 때문에 그냥 웃는다는 대답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학도인 나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대답이다. 산을 왜 오르느냐 왜 사느냐는 질문은 같은 맥락이다. 우리 인생 근본에 대한 질문이다. 나이 오십이 지난 나로서 이것에 대해 생각해 놓은 것이 있다.
산을 왜 오를까?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다. 이미 목표를 정하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럼 처음부터 출발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 삶은 어떨까? 우리의 삶은 사실상 우리 의지없이 주어졌다. 그것이 신의 의지에 의해서든 부모의 뜻대로이든 어쨌든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린 피조물일 뿐이다. 따라서 이미 출발한 셈이다. 마라톤은 출발했으면 그냥 달리는 것이 우리의 명제이다. 산을 오르기로 결정하고 출발했으면 오로지 가는 것이다. 왜 사느냐가 아니고 이미 주어진 삶이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첫 번째 명제이다. 영어로 말하면 "We are born to live." 이다.
우리 인생에는 두 번째 명제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명제는 모두가 다를 것이다. 과학자로서 나의 이 두 번째 명제는 “We are chosen to challenge." 이다. 과학자로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살면서 늘 그렇게 도전 정신을 갖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때로는 좌절하고 힘들 때는 안주하고 싶다. 이쯤해서 그만둬도 괜찮지 않을까 온 세월을 보면 많이 버텨왔는데 이제쯤 그만둬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텐데 조금 쉬운 길을 택해도 괜찮지 않을까... 산에 오르면서도 온갖 생각이 많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 앞으로 남은 여정을 보면 까마득하다. 육체적 피로가 극도에 다다르면 앞에 있는 조그만 언덕이라도 버겹게 느껴진다. 이런 우리의 태도 또한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유혹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차고 나가는 것 또한 우리의 의무이다.
사실 안주하고 살 수도 있다. 그 길이 편하니까. 내가 그 길을 선택했다면 난 30년도 넘기 전 이미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적이 있고 그 때 이미 안이한 삶의 형태가 무엇인지 경험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도대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직업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지금은 내가 추구하는 삶에 만족한다. 무엇인가 늘 새로운 것에 대한 고민이 있고 가끔 안주하려는 마음이 생기지만 여전히 채찍질하고 갈 수 있다. 아직도 젊은 사람들이 시도하는 모험을 하고 싶다.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것이 많다. 아마도 체질적으로 난 편한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집에서도 휴일을 이틀 이상 쉬면 병이 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교수라는 내 직업을 만족할까? 아니다. 사실 난 교수라는 직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유도선수가 되었어도 행복했을 것이다. 유도를 그만큼 좋아했다. 직업으로도 유도관장을 하고 살거나 유도 교사가 되었어도 행복했을 것이다. 교수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따분하고 인간관계가 쉽지 않은 집단이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강한 집단이다. 따라서 위선자적인 성격이 많은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서로 편하게 생각을 주고 받을 수 없는 집단이다. 교수 연구실에 갇혀있으면 세상 누구와도 단절된다. 그렇게 필요하면 늘 도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그래서 용감하지 못하다. 가장 변화에 민감하고 새로운 지식에 밝아야 할 사람들이지만 또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난 평생 교수 연구실 문을 열어놓고 산다. 나를 가둬놓기 싫고 또 들어오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자리는 학생들과 대화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자리이다. 그런 토론을 통해 나를 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된다.
이번 산행 중 얻은 또 한 가지 교훈은 목표를 정했으면 중간에 너무 많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얼마나 남았을까 조금 가서 몇 킬로 남았을까... 중간의 난관이 몇 개나 더 있나... 이런 생각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목표를 정하면 하루하루 한순간 한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결국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올 때 박사에 진학하는 사람은 5년이라는 세월이 길게 느껴질 수 있다. 일년 지나면 앞으로 4년, 2년 지나면 앞으로 삼년... 이런 계산은 자칫 사람을 지치게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연구 결과를 얻으려 노력하고 그 결과를 즐기고 배우다보면 그냥 세월이 가는 것이다. 그 중간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이 자기 삶이 되는 것이다.
이번 산행은 또 다시 나를 경고하는 계기도 되었다. 더 이상 내 몸을 이렇게 방치해서는 앞으로 연구를 활발히 할 수 있는 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게으름에서 탈피해야 한다. 죽는 순간이 내 인생이 정점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아마 죽는 순간 아 이제 좀 쉬자 하고 생각이 들면 난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