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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 폴리텍에서 <2008.06.11 09:22:44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8
  • 조회수15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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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8.06.11 09:22:44


지난주 파리에 도착한 후 벌써 4일째이다. 전혀 4일이 지났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밤은 피곤하여 모처럼 초저녁부터 자기 시작하여 새벽 2시에 눈 떴지만 의도적으로 책을 보지 않고 누워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차 적응이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몸도 가뿐하고 머리도 개운한 편이다. 그래서 모처럼만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조용한 저녁을 즐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근했다. 아직도 날은 훤하다. 이렇게 조용한 날이 나에게 얼마나 있었을까....

이 대학은 파리에서 제일가는 명문인데도 겉으로는 사람들이 게으르게 보인다. 학생들만 열심히 하는 건가... 모두들 일찍 들어가고 학교에 있어도 잡담하는 시간이 많다. 생각을 많이 하는 걸까.. 그런 사람도 있는가 하면 디디처럼 정신없이 바삐 사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우리와 차이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정신없이 사는 나로서는 이곳이 너무 좋다. 조용히 책을 일고 사색하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인터넷은 느려 터져 도저히 이메일을 체크하기가 어렵다. 종일 기다리며 해도 이메일을 모두 처리할 수가 없다. 우리 학교 이메일 시스템의 너무 많은 툴바가 느리게 하는 것인가. 어쨌든 괜찮다. 학교식당의 밥은 벌써 질려온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식당이 생각난다. 그때도 한 달 후쯤에는 식당에 가면 결정을 못하고 몇 번을 망설였었다. 여기에도 한국 학생들이 몇 명 있다. 오래 있는 사람은 역시 힘들어한다. 주말에 라면 끓여먹는 것이 낙이라고 했다. 이해가 간다. 몇 몇 여학생들도 있지만 표정이 밝지 않다. 모두 석사생이라고 했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고 얼굴에 쓰여 있다. 언어 극복, 문화 극복이 큰 과제다. 언어가 극복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다. 너무 힘들어한다. 그런데 반해 남학생들은 상대적으로 표정이 밝다. 아직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성격 차이일까... 성격의 차이일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니 해야 한다는 각오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여학생들은 현실에 상대적으로 약하다. 어려운 환경을 피하고 싶어한다. 이것도 성의 차이일까.... 그러면 여성이 성공할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인가... 우리 실험실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남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내 눈치를 덜 보고 소신껏 일을 한다.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내 눈치를 많이 본다. 이것은 무슨 차이일까 독립성의 차이인가... 그렇다면 여성이 성공하려면 서로 도와 장단점을 매워주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일까... 세상 사는 것이 어렵다.

파리는 나와 인연이 많은 곳이다. 이제는 파리가 가장 친한 곳이 되어 버렸다. 도시 구석 구석 나의 흔적들이 있다. 내일이면 다시 시내로 호텔을 옮긴다. 여기서는 생활이 불편하니 모두 그것을 추천한다. 다행히 디디 교수가 돈을 많이 챙겨주어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환영해 주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연구를 하면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공부하는 또 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어느 직업에서 전 세계 친구들을 우리처럼 많이 사귈 수 있을까... 살면서 좋은 친구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인생의 행운이다. 그렇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내 삶의 흔적에 또 다른 아픔들이 있다. 때로는 아련한 아픔들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째찍이기도 하다. 나를 게으르게 하지 못하는 이유들인 것이다.

프랑스 말은 생각보다 발음이 어렵다. 오늘부터는 시간나는대로 책을 외워야겠다. 다른 방법이 없다. 머무는 시간이 짧아 여기서도 정식으로 선생한테 배우기가 힘들다. 시내로 가면 말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여기서는 모두 영어를 쓰니 배우기가 더 어렵다.

디디를 한국에 초빙하는 것은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받는 월급도 너무 많다. 또 중학생인 매튜도 문제지만 대학생이 되는 사비어가 더 문제다. 생각보다 제니퍼는 아시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역시 여자이니 생활의 불편함이 우선이다. 학교에서 집을 지원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나를 믿고 오는 것을 고려해주는 디디가 고맙다. 사람들은 모두 좋다. 이번이 정말 드림팀을 구성하기에 너무 좋은 기회이다. 정부에서의 지원없이는 학교에서 이런 계획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돈이 있다고 정년 퇴임하는 교수들을 불러다 돈 잔치 할 생각은 없다. 이런 일을 추진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허비되지만 정말 전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한 연구팀을 만들 수 있다면 한번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학과, 꿈을 가진 과, 경쟁력이 있는 과, 일하기가 신나는 과, 만나서 즐겨 일하는 과, 피부색, 학벌 편견없이 실력있는 누구든 환영하는 과, 서로를 존중해주는 과, 나이든 경력자 신념을 가진 젊은 연구자가 어울려 일할 수 있는 과, 신명나는 그런 과를 만들 수 있을까....

인구수보다 관광객 수가 더 많은 이 나라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게을러 터진 이 나라 사람들 틈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는 것인가. 과연 이 사람들은 조상 덕만 보고 사는 사람들인가, 연간 관광객 수가 자기 인구수보다 많은 나라, NT/IT 등의 선진국 틈 바구니에서 농업이 강한 나라 과거 강철국가를 자랑하는 에펠탑을 폼으로 갖고 있지만 지금은 산업이 없는 나라, 그러면서도 전 세계 가장 좋은 전투기, 에어버스를 만드는 나라, 원자력발전에 앞서가는 나라, 테제베를 갖고 있는 나라, 자기들 음식 맛이 제일이라고 믿는 나라, 소매치기가 드글대는 나라, 교통신호 안 지키고 끼어들기 명수인 나라, 아침 11에 나오는 비서를 몰아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나라, 관료주의가 나라를 망치는 나라, 영어를 지지리 못하는 나라, 그러면서도 미국과 대항해 싸우는 유일한 서양 나라, 서양 나라치고 옷 입는 것 신경쓰고 결혼해도 몸매 유지에 신경쓰는 여자들, 나이 들어도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는 이 나라 여자들, 나는 지금 그런 나라에 와 있다. 이 곳의 조용함을 즐기고 있다. 난 이들로부터 무엇을 배울까. 아니 무엇을 배우기보다 난 이곳에서 이 사람들의 생각을 사랑하며 지낼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언젠가 우리도 이 사람들보다 잘 살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를 꿈 꾸면서... 그것이 내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내 다음 세대에는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