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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대학에서 <2008.05.26 11:35:26 >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3-04-08
  • 조회수1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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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8.05.26 11:35:26


복잡한 베이징 시내와는 달리 여기 베이징 대학에는 대학 한 가운데 호수가 있다. 그것도 작은 호수가 아니고 상당히 큰 호수이고 잘 정돈되어 있는 곳이다. 언젠가 가 봤던 듀크 대학의 잘 가꾸어진 정원에 비하면 여기는 자연에 가깝게 정리된 곳이다. 호수 주위에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고 소나무는 피부 색깔이 백색에 가까운 회색이다. 나이가 오래된 탓일까^^ 종류가 다른 것 같다. 아마도 인공 호수이겠지만 중국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작업들이었을 것이다. Forbidden city의 돌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 먼 곳에서 이동하면서 그것이 강이 되었다니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만이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는 비교적 조용한 곳이지만 근처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북경이 올림픽 때문에 변화하는 것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한가하게 소풍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아이들 몇이서 낚시하는 모습도 보인다. 낚시하는게 아니라 노는 것 같다. 한 아이는 나름대로 미끼를 위해 지렁이를 땅에서 파고 있다. 때 묻지 않은 모습이다. 내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다. 90년대 초반에 왔을 때의 모습에서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은 느낌이다. 사람들이 아직도 거친 느낌이 있다. 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운전하는 것이 기적처럼 보인다. 바로 옆에서 차가 자전거를 치여도 누구 하나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거리는 여전히 먼지로 가득하다. 예전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차가 많아지고 사람이 더욱 분주해진 것 이외에는...
북경에 온지 이틀이 지났다. 어제는 과에서 토의하느라 종일 화학과에서 지냈고 오늘은 혼자다. 토요일은 무척 한산한 느낌이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우리나라 가을을 연상케 한다. 저녁에도 서늘하여 침대보 하나로도 부족하다. 더울 것을 예상하여 긴 팔하나 가져오지 않은 것이 나의 불찰이다. 콧물이 나고 목이 따가운 것이 보니 감기가 올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비상 약으로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늘 여행하면서 느끼지만 여행을 위해 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고생할 것 같다. 인생이 원래 이런 것일 것이다. 아무 준비없이 오고 그렇게 준비없이 가고....

여행은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을 때는 모른다. 그러나 여행은 많은 시간을 혼자 있어야 한다. 혼자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지만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지만 또 많은 시간을 외로움과 싸워야 한다. 서늘한 바람이 외로움을 더하게 만든다. 이 외로움은 여행이 제공하는 새로움과 예상 밖의 일들이 어느 정도 보상하지만 여전히 버티기 힘들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난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내 삶을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리움과 회한들...... 나를 아프게 했던 많은 일들... 그러고 보면 나의 삶의 대부분은 학교인 것 같다. 내가 준비했던 기간들을 빼면 그져 나의 삶은 대학의 실험실에서 삶이었다. 그런 단조로운 삶 속에서도 참으로 많은 부딪힘들이 있었다. 아픔들, 즐거움들 그런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 중에서 이렇게 혼자 있을 때는 아픔들이 더 많이 다가온다. 내가 아프게 했던 많은 사람들... 왜 그렇게 밖에 대하지 못했을까... 내가 지금 그 때 그 일을 모두 알았더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텐데.. 그런게 인생인가... 모두들 잘 살고 있겠지...

중국말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다. 선생없이 나 혼자 배우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발음의 규칙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사성도 마찬가지고... 이번 기간은 그러기에 너무 짧다. 다음 7월은 가능할 것이다. 이제 이 연못가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주위가 시끄럽다. 영어를 배우려는 중국인들이 왜 이곳에서 발음을 연습하는지 모르겠다. 이곳은 연인들 가족들이 많이 오는 곳인 모양이다. 등 뒤로 느껴지는 햇살의 따사로움이 감사하다. 오늘은 참으로 화창한 날이다. 구름한 점 없는 날이다. 이 좋은 날 호텔에 들어가기 싫다. 그러나 바람이 차갑다. 내 몸이 버텨줄까...

이틀동안 Al 책을 일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지만 모두 새로운 사실들이다. 그동안 우리 실험에서 우리가 관측한 것들에 대한 이해와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이 있다. 앞으로 여기 있을 일주일동안 이 책을 마져 끝내야 할 것 같다. CNT가 들어가면서 기존의 재료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새로운 현상들이 관측될 수 있는지 무척 흥미롭다. 지금은 제품의 요구조건을 맞추기 위해 이런 학문적인 것들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없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것들이다. 이 재료를 갖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 같다. 이 재료를 갖고 국가의 경쟁력에 기여할 수 있으면 그것 또한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시간이 너무 없다. 빨리 제품의 특성을 맞추어야 하고 논문도 쓰고 싶다. 돌아가서는 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 책을 같이 읽어야하겠다. 이 일이 수반되어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우선 이번 여행동안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이번 여행동안 내가 맡은 책 쓰기를 마치기로 했지만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이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호텔로 돌아가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어제부터 읽은 책이 이제는 절반을 넘어섰다. 마치 고시 공부하는 사람처럼 이틀동안 방에 쳐 박혀 앉아서 책을 읽다보니 다른 나라에 와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생겨나지 않으니 그나마 나한테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책을 읽다보니 제품을 만들기에는 정말 많은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물성이 다르고 그 때마다 처리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또 조사해야 할 물성이 너무 많다. 최대 인장강도, 영율, 경도, 항복인장강도, 신율, 열처리 특성, 부식특성, 도장성등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또 GRAIN BOUNDARY 형성이 이들의 특성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마도 이 책 하나를 다시 써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연 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인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내가 과연 이 일에 얼마나 전력투구를 해야 할까. 얼마나 투자할 수 있을까... 상당히 많은 부분은 엔지니어 일이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해야 할까. 다른 사람처럼 그냥 기초과학자의 수준을 유지하고 빠지면 이 일이 어떻게 될까. 과연 회사에서 이 일을 이어가 제품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그 많은 제품군을 어떻게 할까... 내가 해야 할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반도체 재료를 처음 개발한 바딘과 쇼클리는 어떻게 했나... 바딘은 학자로 남았는데 쇼클리는 결국 회사 일에 뛰어 들었다. 둘 다 성공한 과학자이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능력은 그들의 능력에 못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 내가 다할 수 없다. 과연 회사가 어디까지 투자할 수 있을까.. 회사가 그리 튼튼하지 않다. 당장은 투자하겠지만 돈이 되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올해 안에 한 제품을 승부하려면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이 일이 쉽지 않음이 느껴진다.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도 공학적인 측면들이다.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지만 과연 어디까지 가고 내가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너무 무모한 도전인가 지금처럼 과학자로서 남아있으면 나로서는 편한 게임이다. 논문쓰고.... 그러기에는 회사가 힘이 없다....

종일 방안에 있으면서 빵 하나로 버텼더니 배가 고프다. 나가기가 귀찮다. 혼자서 밥 먹기가 싫다. 한국에서도 혼자 있을 때는 그냥 굶었는데 이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다. 외로움이 싫은 것이다.... 외로워 보이는 것이 싫은 것인가..., 어제 밤에는 책을 읽으면서 먹으니 한결 나았다. 말이 안 통하니 참 어렵다. 밖에서는 모두 영어를 한 마디로 못하니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KFC에 근무하는 아가씨들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혼자 먹는 연습도 해야겠다. 혼자 있는 연습이 쉽지 않다. 이 나이가 들어도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쉽지 않다. 영어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텐데... 그러고 보면 이런 나의 단점을 아이들도 그대로 닮은 것 같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싫어한다. 서로 어울려 사는 세상인데... 세상을 어렵게 산다. 타고난 것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몸은 여전히 무겁다. 목이 아프지만 다행히 더는 악화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내일은 난조로 출발한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 몸이 버텨줘야 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비타민이라도 가져오는 것인데... 다른 때는 가지고 다녔던 것들인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다.. 혼자 있을 때 제일 힘든 것이 바로 몸이 아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