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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대인, 소인

  • 작성자이영희
  • 등록일2015-11-24
  • 조회수7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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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은 늙어서 그런지 역사에 관심이 많다. 내가 속한 사회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온 것을 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반성도 된다. 기상이 높아 주변국에 위협이 된 사람도 있고 가난해도 선비다운 기개가 높아 주위의 귀감이 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비굴하게 권력에 빌붙어 사는 사람, 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낀 것 또한 내 조상들일 것이다. 지난 시기동안 대부분의 조상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대부분 가진 자들의 횡포에 의해 쌓아 놓은 노력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노력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난 그런 것이 그저 놀랍다. 어렸을 때 나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우리 엄마는 그래도 우릴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가난한 집에서 살아남았다. 어린 나도 우리 엄마가 도망 안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난 지금도 엄마한테 감사하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테니 말이다. 나라면 과연 버텼을까..
그런 역사와 나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학교, 학과, 연구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가끔 나를 의심한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가. 연구소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할 때 난 과연 나 스스로에게 공정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정한 사람일까.. 아니 그렇게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가...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제는 많은 일들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난 정말 잘하고 있는가... 학교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 많은 경우 그렇게 공정한 기준에 근거해 처리되는 것 같지 않다. 학과, 연구소 교수들 아직 모두 젊어서인지 일을 매듭지을 때 공정한 것이 기준이 되어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궁금하다. 어느 것이 기준이 되어야할까? 과연 답이 있는 것이나 한 것일까? 그럼 나는 제대로 결정하는가??
사람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아니 공정하게 처리하기란 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현명하게 처리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리더로서 현실법에 저촉되더라고 그 단체의 발전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공적으로 옳은 것과 자기의 이득과 관련된 것을 혼합하여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공적인 이득과 사적인 이득을 구분조차 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득이 의사결정의 근거가 되어 버린다.
어렸을 때 읽은 위인전 중 하나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우암 송시열이 조정에서 일할 당시 친척 중 젊은이가 찾아와 벼슬 천거를 부탁했다. 당시의 사회 관습으로 보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우암을 그런 친척을 돌려보내지 않고 본인과 한 방에 재웠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가 되자 젊은이에게 먼저 하라고 양보했다. 세수 후 젊은이는 곁에 놓여 있는 수건을 사용하고 내려 놓았다. 우암이 세수하고 보니 하나밖에 없는 수건이 모두 젖어 있었다. 그러자 우암은 당신은 벼슬 자격이 없다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우암은 젊은이가 하나 밖에 없는 수건인 것을 알고도 다른 사람을 위해 절반만 쓰는 배려감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그런 사람이 벼슬을 하면 백성을 보살피지 않고 자기 욕심만 차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난 지금도 이것이 우리가 공적인 위치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기본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사람이 이기적인 동물이라 매사의 결정 기준이 공적인 것이 되기가 힘들다. 내가 속한 사회에 이득만을 최대화시키는 사람은 스스로의 개인의 이득을 희생하기 일쑤다. 이런 사람은 우리는 성인이라 부른다.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 인류사회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공적인 이득과 사적인 이득 둘을 생각한다. 이 중 사적인 이득을 억누르고 공적인 일을 선택하는 사람은 대인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 중 사적인 이득에 얽매어 매사를 결정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소인배에 해당한다. 대인과 소인의 선택은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사람은 교활해 자기가 사적인 이득에 얽매인 결정을 해도 공적인 이득을 위한 결정이라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기술이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더욱 심하다. 교수라는 집단도 여기에 속한다. 교수의 결정은 대부분 철저하게 개인의 이득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겉으로 온갖 종류의 이득을 대지만 결국 속으로는 자기의 이득만을 생각한다. 대학에서 총장 선거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반 소시민은 오히려 여기에 휩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은 바른 대통령을 뽑기도 한다. 대학은 그렇지 않다 그러기에는 교수가 머리가 너무 영악하다. 학과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할 때 과연 난 학과의 발전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 내 이득을 주판튀길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내 이득만을 생각할까. 전자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지만 후자라면 정말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 난 어디에 속할까...헉 사는 것이 쉽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