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S Institute for Basic Science
Search

대서양을 건너며

  • 작성자Center for Integrated Nanostruture Physics
  • 등록일2017-07-10
  • 조회수5092
  • 파일
내용보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잔 것 같다.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자마자 밥도 먹지 않고 잤으니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다.  자고나니 무겁던 몸이 가벼워졌다. 한국시간으로 오후 1시이니 비행기를 탄지 만 하루가 지났다. 파리에서 5시간의 기다림이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영조가 같이 가는 덕분이다. 

  비행기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모두가 잠에 빠져있다. 나만 깨어 컴퓨터를 켰으니 다른 사람들을 깨울까 조심스럽다. 한국에서 파리까지 11시간 반, 브라질까지 또 다른 11시간 반, 리오 데 제나리오에서 헤시피까지 또 3시간... 긴 여행이다. 고단하지만 여행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래서 한편으론 여행이 좋다.

사실 이번 여행은 두 개의 학회를 동시에 가려했는데 스케줄이 꼬여 결국 헤시피에서 이틀 머물고 돌아오는 초고속 일정이 되어버렸다. 다음 주 목요일 아침에 도착하여 오자마자 10시에 또 삼성회의가 잡혀있다. 최악의 스케줄이다. 이 먼 곳을 가는데 고작 이틀이라니.. 그래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책임지고 일을 하는 한... 그러고 보면 인생은 일에서 해방될 때까지 이런 구속의 연속일 것이다. 그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한다. 이런 구속은 원시사회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먹고 살기위해 받는 구속.. 남자는 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을 해야하고 여자는 요리를 해야 한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 한 살면서 행복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일은 피할 수 없으니 부딪혀 즐기는 수밖에.. 살아있는 모든 자의 숙명이다, 목이 길어서 슬픈 기린처럼... 

요즈음은 논문을 쓰느라 시간에 쫓긴다. 이번 출장 전에 끝내고 싶은 논문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포기했다. 마음만 다급해지고 좋은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다. 논문은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갔다와서 차근히 볼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한다. 기간과의 싸움이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한 겨울을 지내야하는 것처럼 논문도 그렇다. 그렇게 곱씹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라는 책을 보면 소설을 쓰는 그의 태도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굉장히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다.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그렇게 드러내기도 힘들다. 그것은 글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가 아니라 사람관계에서 마음의 드러내기다. 어떤 사람은 친해도 정작 본인의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처음 만나도 말 한마디로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어 나를 가끔 놀라게 한다. 그런 사람은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다. 그리고 적어도 사람을 속이지는 않은 거라는 믿음이 간다. 사람이 친구가 되는 것은 이것 이상의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이런 마음은 사람관계의 기본이다. 평소에 친구를 잘못 사귀는 사람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라카미는 소설을 어떤 동기로 어떻게 쓰는지 자세하게 자신의 느낌을 기술하고 있다. 
  
소설쓰기는 논문 쓰기와 아주 비슷하다. 우선 장편일지 단편일지 테마를 구상하고 그에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연구를 통해 필요한 데이터를 얻고 그림에 표현하는 일과 비슷하다. 소설에 따라 자료 모으는 일이 때로는 몇 년이 걸릴 때도 있다. 소설이 특히 역사를 배경으로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짧은 번뜩이는 착상에 기반을 둘 때는 단편소설의 형태를 띨 것이다. 탐정소설은 사실 후자에 속한다. 우리도 일의 성격에 따라 레터나 긴 논문의 형태를 선택한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작업을 위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외딴 곳에 가서 작업하기도 한다. 우리는 논문을 쓰기 위해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논문 쓸 때는 방해받기가 싫다. 그러나 고작 연구실 문을 닫는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하루에 써야 할 분량을 정해놓고 쓴다. 200자 원고지로 20장..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게으름부리지 않기 위해... 사실 글이란 일단 속도가 붙으면 순식간에 써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몇 자도 쓰기 힘들다. 그러니 이렇게 정해놓고 쓰기란 때로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써야 한단다. 또 재미있는 것은 긴 소설중 잘 쓰여진 부분, 대충 쓴 부분을 섞어야한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여백이라고 할까.. 독자가 때로는 급하게 때로는 천천히 따라오도록 강약을 조절해야 한단다. 사실 나에게 이 부분은 의외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모든 부분에서 최선을 다해 완벽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정상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런데 사실 논문쓸 때도  이런 부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이언스나 네이쳐 논문을 쓸 때는 글자 수가 정해져 있어 많은 것을 짧은 문자에 함축시켜야한다. 쉽게 써야하고... 그런데 어떤 단계에서는 일반 독자들이 따라올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을 위해 자세하게 써야 할 부분이 생긴다. 아마도 이런 부분도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의도이지 않을까.. 굳이 논문으로 해석하자면.. 

더 재미있는 대목은 초고 이후이다. 초고를 끝내고는 한동안 다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한단다. 그는 이 시간을 시멘트 양생기간으로 보았다. 아마도 이 사간동안 다른 일을 하면서 작업했던 수많은 부분들을 무의식적으로 곱씹어 볼 것이다. 그렇게 머릿속을 비우고 다시 본단다. 그리고 때로는 초고에 있던 내용을 대폭 수정하거나 과감히 삭제한단다. 논문을 쓰면서 우린 일단 초고를 쓰면 거의 다 끝난 일로 생각한다. 과감히 삭제하기를 아까워한다. 자기가 고생해서 얻은 데이터를 최대한 살리려 한다. 그것이 원래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어도 말이다. 더구나 교수가 쓴 부분은 더욱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무라카미에 의하면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그런데 난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에 따르면 2차 수정도 대폭 수정이다. 이런 수정이 때로는 원래 목표를 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또 이 때 삭제된 주제가 다음 소설의 주제가 되기도 한단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논문의 주 주제와 맞지 않는 경우 이런 부분은 다른 논문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3차 수정에서는 비로소 작은 문법, 문체등 소소한 수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초고 이후 1차, 2차를 건너뛰고 3차로 바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번 음미해볼 대목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이다. 이런 작업이 다 끝나면 주위 사람들한테 그 글을 읽어보고 비평하라고 한단다. 그 사람이 전문가이든 아마추어이든 관계없다. 그의 경우 부인의 코멘트를 꼭 듣는다. 자기가 잘 썼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비판을 하면 사실 기분이 나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비판할 때 어쨌든 무언가 불편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모든 비판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어느 비판이든 귀 기울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곱씹어 봐야한다. 그의 경우 어느 특정한 부분을 지적받을 경우 비판 내용에 관계없이 다시 쓴다고 한다. 많은 경우 그러면 더 쉽게 이해가 된다고 한다. 좋은 태도이다. 우리의 경우 리뷰어의 비판을 통해 이런 과정을 거치지만 사실은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주위 동료들한테 읽어달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논문을 쓰는 것은 고도의 창작 작업이다. 실험이 끝나고도 많은 생각을 해야한다. 학생의 입장에선 실험데이터가 좋으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실험 과정동안 많은 논리를 쌓았어도 논문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어 새로운 논리가 나오기도 한다. 현대문화는 우리를 생각하게 놔두질 않는다. 끊임없는 정보의 입력이 우리를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혼자 외롭게 지내는 시간이 너무 적다. 그래서 내적인 힘이 부족하다. 외부 충격에 약하다. 조금만 센 충격이 와도 쉽게 무너진다. 내적인 성찰이 부족한 탓이다. 우리 대학원생들이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의 숙제다. 외로움은 때로는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가끔은 외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 지내는 시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다. 사람이 옆구리가 시려지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