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S Institute for Basic Science
Search

노모와 고스톱

  • 작성자Center for Integrated Nanostruture Physics
  • 등록일2017-05-02
  • 조회수6627
  • 파일
내용보기

외가 식구들이 단명하다고 본인도 단명할 것이라 예측했던 어머니가 어느새 85살이 넘어섰다. 7년전 뇌출혈로 입원하시고 병원에서 나온 후 곧 치매도 올 것이라던 의사의 예상과 달리 잘 버티신다. 그러나 몇 년전부터 시골에서 혼자 사시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에 누님 집에 방을 따로 장만하여 살고 계신다. 아들은 역시 이 부분에서 그냥 울타리이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가끔 우리 집에 오셨다 손주들 보고 가신다. 

그런 어머니가 얼마 전 우리 집에 들렀을 때만해도 웃음이 많으시고 며느리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말씀이 없으시고 기력을 잃으셨다. 웃음기도 없어지고 의욕도 완전 땅이다. 식사도 줄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내 마음이 말이 아니다. 누나가 발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고 짜증이 늘면서 엄마도 우울증에 걸리셨다. 그나마 아이들이 주말에 모이면 웃으신다. 집안 대대로 손주사랑은 대물림인 모양이다. 덕분에 집안에 말은 안하지만 비상이 걸렸다. 나도 가능한 저녁엔 집에 가서 엄마랑 같이 식사하고 식사시간마다 잔소리처럼 이것 저것 챙겨서 드시게 한다. 마누라의 정성이 예뻐서인지 아님 며느리의 잔소리가 무서워서인지 그렇게 하면 드신다. 매일 밖에 나가 산책하라는 잔소리에 그나마 아픈 다리를 끌고 나가신다. 막상 같이 나가 산책해도 별 말씀이 없으시다. 한 바뀌 도는데 0.8 KM 정도 되니 엄마에게는 그리 쉬운 산책이 아니다. 하기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러기가 귀찮아진 것이다. 

얼마 전에는 밤에 우두커니 앉아계신 엄마를 채근하여 고스톱을 하기로 했다. 손이 말을 안 듣고 생각이 잘 안 난다던 엄마가 고스톱 두시간만에 판쓸이를 했다. 내돈 5만원 마누라 돈 만원을 모두 딴 것이다. 나도 고스톱에서 잘 잃지 않는 편이고 지고 싶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내 날이 아니었다. 엄마 표를 슬금슬금 보고 치는데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스톱도 인생판이다.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모처럼 고스톱 치면서 엄마의 주름진 얼굴에서 웃음을 보았다. 소리내서 웃으시고 큰 소리도 내셨다. 다음 날도 또 고스톱을 쳤지만 아들과 내가 또 잃었다. 지난 주말에는 엄마가 고스톱으로 딴 돈으로 감자탕집엘 갔다. 

엄마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본 마누라는 평소대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식구들 이름을 쓰게 하고 숫자도 쓰게 한다.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갖다가 읽게 하기도 한다. 떠듬 떠듬 읽는 것이 가능하고 그래도 잘 기억하는 편이다. 글씨도 곧잘 쓰신다. 그러나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하시고 실망하기도 한다. 자신이 그렇게 밖에 못하시는 것에 실망하신다. 아마도 나도 늙으면 그럴 것 같다. 지금도 내 체력의 한계에 다다르면 젊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고 푸념한다. 나의 쇠퇴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씩 기력이 돌아 온 것이 보인다. 표정도 밝아지고 말씀도 조금 더 하신다. 웃으시기도 하시니 그래도 안심이 된다. 아들은 울타리라고 하신 엄마의 말씀이 마음이 저려온다. 울타리는 그저 멀리서 바람 방패막이가 될 뿐 집안에 거처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아들은 그런 것이다. 젊었을 때 누구보다 고생하신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살아 계실 때 잘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생각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일까. 오늘 저녁에는 엄마가 책을 읽는 것을 들어야겠다. 그림 그린 것도 잘했다고 칭찬해드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