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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 작성자Center for Integrated Nanostruture Physics
  • 등록일2017-04-03
  • 조회수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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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온 것이 아마도 10년은 훨씬 전인 것 같다. 전에는 국내선 연결이 다른 공항이어서 애를 먹은 기억이 생생하다. 러시아에 도착하면 우선 언어가 너무 낯설다. 영어가 없으니 그런 느낌이 날 것이다. 글자 모양이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리스 고어체나 라틴어 정도일까. 아마도 우리 글자도 외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영어가 혼용되어 있으니 답답함이 덜할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영어에 이렇게 사로잡혀있을까.. 아니 언제부터 영어가 전 세계의 공통어가 되었을까. 아니 언제부터 영어를 쓰는 나라가 패권을 쥐게 되었을까... 아마도 19세기나 20세기 초일까... 
   문득 생각해본다. 무엇이 이들을 강하게 만들었을까. 여기는 힘을 잃은 나라지만 영어권의 영향을 적게 받고 있는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10년전 국내선의 타기 위해 헛고생한 경험이 떠오르지만 지금은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소치비행기를 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안내판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잘 쳐다봐야 보인다. 공항내 식단에 앉아 TV를 보니 영어권의 영향이 느껴진다. 음악은 모두 영어 노래다. 스테잌을 시켜 먹었는데 맛이 있다. 양도 많지 않아 좋다. 소스 맛도 좋고 감자요리가 부드럽고 맛있다. 그 사이 방송에서는 강남스타일 신나게 나온다. 그러고 보면 이런 문화의 공유는 이제 전 세계 어디서나 같은 것 같다. 그러나 고유의 것이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 문화의 공유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중국을 뭐라고 해야할까. 나라의 실익을 위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인데 우린 그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드는 분명 두 나라 사이에서 우리에게 좋은 협상 카드였는데 바보같이 모두 기회를 잃어버렸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모스크바는 끔찍하다. 아직도 사방이 눈이고 강물은 꽁꽁 얼어있다. 분명히 소치의 온도는 10-15도였는데... 소치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소치는 흑해 근처로 소련에서도 제일 따뜻한 곳이고 그래서 휴양지란다. 여기서 겨울 올림픽이 열렸다는 것이 나로서는 신기하다. 밤 12시 넘어 도착이라서 잘 몰랐지만 이곳은 야자수도 있다. 소치에서도 여기 리조트까지는 택시로 한 시간이나 걸린다. 숙소에 도착하여 쓸어져 잤지만 잠이 깊게 들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은 눈을 붙인 것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뷔페를 먹었다. 음식 맛이 별로다. 메뉴도 나쁘다. 첫 발표라 조금만 먹었다. 컨디션이 나쁘다. 방에 돌아와 즉시 껌을 씹었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래도 토크는 그럭저럭 끝냈다. 오후에는 휴식시간이라 밖에 나가 걸었는데 공기는 쌀쌀하지만 걸을만했다. 다행히 콤비라도 가져와서 별 문제가 없었다. 
   여기는 정말 휴양지 같은 느낌이 든다. 소치시는 올림픽 때문에 호텔을 엄청나게 지었지만 지금은 모두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여기 리조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런 낭비가 어디 있을까. 한 곳에 올림픽을 수용하니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을 근처에 있는 작은 스키장에 분산하면 과대 투자를 막을 수 있고 추후 이용에도 훨씬 용이할 것이다. 어차피 선수들이야 한 종목에 출전하니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 별 문제가 없고 다만 관계자들이 왔다갔다 불편할 뿐이다. 경기 이후 이들 시설관리가 더욱 큰 문제다. 정말 정치가들은 이런 부분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점심을 먹으며 김박사와 일에 대해 많은 토의를 했다. 두 번째 논문의 관련 물리현상이 모호했었는데 정말 기막힌 생각을 해냈다. 레이져를 쏘았을 때 발생하는 photo carrier와 coherent phonon이 결합하여 폴라론이 형성되어 가역적인 상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picosecond 단위이내에서 일어난다. 정말 새로운 현상이다! 금속-반도체 구조적인 상전이를 그렇게 빨리 가역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정말 이런 생각을 발전시켜 picosecond로 스윗칭하는 소자를 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역시 생각은 나누면 커진다. 이것은 기막힌 발견이다. 여기 온 것이 100% 효력이 발생한 것이다. 이래서 사는 맛이 난다.
   그러나 몸 상태는 꽝이다. 호텔에 들어와 잠시 쉬는데 어지럽다. 땀도 난다. 밤 세션을 나가지 않고 쉬고 있다. 아마도 적응기간일 것이다. 오늘 잘자고 나면 나아질 것이다. 
   잠을 푹 자고 나니 정말 거짓말같이 몸이 좋아졌다. 아마도 발표가 끝나 긴장이 풀려 몸이 좋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늘 하는 발표지만 남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항상 긴장되고 신경이 쓰인다. 여기서 발표하는 사람들의 연구의 질은 우리 무주에 비해 낮다. 포스터도 마찬가지다. 러시아가 연구의 후진국이 된 걸까? 아니면 연구의 전통이 다른 걸까? 연구주제가 너무 구태의연하고 데이터 표현 및 해석능력이 떨어진다. 논문을 소련 저널에 주로 낸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직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이들은 전에도 그렇게 해왔다. 그렇게 해서 경쟁력을 길러왔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들과는 다르다. 우리가 더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기는 하지만 이들보다 더 경쟁력이 있을까? 
  모르겠다. 지내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도 따라온 연구가 더 많다. 물론 사회가 필요한 연구주제를 선택해왔다고 합리화시킬 수 있지만 더 창의적인 연구를 못한 것은 사실이다. IBS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런 연구환경을 전에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여기까지 오는데 댓가를 치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coherent phonon 상태가 polaron을 형성해 coherency가 깨져 상전이가 일어난다는 것, 또 여기전자를 없애면 바로 phonon dephasing에 의해 원래의 2H상이 회복된다는 것. 여기까지 개념은 발전시킨 것이 여기에 온 소득이다. 한국이라면 이렇게 이틀을 한 가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생각할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창의적인 연구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우리보다 좋은 환경에 있다. 우리 다음세대는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오후에는 곤돌라를 타고 여기 스키장 정상에 올라갔다. 아래는 눈이 거의 녹았지만 정상은 눈으로 덮혀있다. 여기는 아직 봄이 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그래도 온도는 그리 낮지 않다. 하기야 몽불랑에 갔을 때는 여름이었지만 정상에서 스키를 즐기는 친구들이 있었다. 여기는 아직도 한창이다. 우리의 제주도 같은 러시아의 휴양지가 이러니 여기는 아직도 겨울임에는 틀림없다. 정상에 올라가니 구름이 앞산 정상 위에 바다처럼 펼쳐져있다. 장관이다. 하기야 높이가 3000미터가 넘으니 지리산과 느낌이 다를 법하다. 구름 한점없는 날이라 햇볕에 있으면 추운 느낌이 없다. 햇살이 너무 따갑다. 공기는 정말 최고다. 가슴으로 느껴진다. 언제부터 이런 느낌을 잃어버린 것 같다. 내가 촌놈이라는 것을. 도시의 삶에 익숙해진 것이다. 가파른 스키슬롭이 이제는 내가 즐길 수 없는 먼 대상처럼 느껴진다. 내가 어렸을 때 스키를 배웠더라면 아마도 난 무모한 도전을 지금도 즐겼을 것이다. 가파른 산 중간 중간 그런 무모한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모험은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모험을 통해 인류는 발전해왔을 것이다. 산 위에서 점심을 먹었지만 값이 지상에 비해 비싸지도 않다. 우리 같으면 훨 더 받았을 것이다. 여기 음식은 의외로 간이 잘 맞추어져 있다. 소스도 신맛이 나는 것이 보통이다. 수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신맛이 나면서 간이 잘 맞으니 맛이 있다. 들어가 있는 소고기도 쫄깃하여 식감이 좋다. 피자는 꽝이다. 하긴 피자는 이들 음식이 아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지금은 모스크바 공항 라운지다. 사람이 많다. 모스크바가 틀림없다. 그리고 겨울이다. 자그마치 거의 5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오히려 여유스럽고 좋다. 여행의 여백지처럼 또 많은 생각을 그 여백지에 추가로 그려 넣을 수 있다. 여행은 나를 자유스럽게 만든다. 눈 앞에 펼쳐지는 다른 광경들이 상상의 나래의 폭을 넓혀준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과학적인 고민들이 마찬가지로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간다. 얽혀있던 생각의 실타래가 하나씩 풀린다. 일에 얽메이지 말고 내가 일을 끌고 가야한다. 그러면 자유로울 수 있다. 비록 일이 많더라도. 사람 관계에서도 마음 속 서운한 많은 것들을 가능한 빨리 빼내야 한다. 무엇이 우리 모두에게 최선인가만 생각한다. 그냥 사랑할 것들을 사랑하고 미워할 것들을 미워하자. 왜 그래야하는지 고민하지 말자.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의 느낌을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