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쌀쌀해졌다. 변덕이 심한 걸 보니 겨울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캠퍼스의 노랑 은행잎이 어느새 누렇게 변하고 있다. 그렇게 변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세월은 무심히 가지만 그 무심한 세월을 채우는 우리네 삶은 고단하다. 아니 그러니까 재미있다. 힘드니 또한 살만하지 않은가. 무미건조한 삶이란 의미없다. 살아있다는 것 또한 고단함을 의미하지만 고단함 또한 나를 단련하는 것일테니 감사할 일이다.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인생의 고단함을 갖고 있다. 모두 그 고단함을 갖고 열심히 싸운다. 하지만 제자리에 맞는 고단함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자기의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모두 떠 넘기는 사람도 있으니 스스로 삶의 고단함을 지지 않겠다는 심산일게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인 나의 나라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마치 선조처럼 왕이 되어 신하에게 책임전가하는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 결정할 일을 모두 신하에게 떠 넘긴다. 심지어 자기가 결정해야 할 일조차도... 우리의 슬픈 모습들이다.
나에게 있어서 고단함은 무엇일까. 나는 나의 고단함을 피해가고 있지는 않는가? 교수로서 나의 의무는 가르치는 것과 연구하는 것일게다.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가르쳐왔을까. 또 무엇을 배워왔을까. 나이 삼십이 넘도록 우리는 배운다. 아니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왜라고 물으며 배우기 시작한다. 인간은 동물처럼 태어나자마자 걷지도 못한다. 미숙아로 태어나 학습을 통해서 스스로 서고 질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것도 부족해 학교라는 정해진 틀 속에서 오랫동안 배워야 혼자서 선다. 30이 지나서 말이다. 그러고 나서도 지금까지 끝없는 지적인 훈련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렇게 무엇을 배웠을까. 생각해보면 그런 오랜 배움을 끝에서 난 이제 겨우 질문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질문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그냥 호기심으로 질문하고 그 호기심에 대답하려는 나의 노력이 고단함일게다. 그러나 그런 질문에 답하는 즐거움이 있으니 이 일이 단순히 고단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가르쳐왔을까. 정작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왔을까. 아니 질문을 오히려 방해하는 가르침이 더 많지 않았을까. 가슴이 허해지는 대목이다.
연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은 제대로 질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 질문하던 버릇을 어느새 학교라는 틀 속에서 잃어버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 수십년을 연구와 좌충우돌하면서 얻은 결론이 겨우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배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배웠다기보다 잃었던 나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질문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질문이 올바르면 거기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답이 가능한지 안한지 알 수 있다.